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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들·용어

슬라보예 지젝 - 독일관념론의 주체와 정신분석학의 주체

by 길철현 2019. 2. 3.

   칸트에 의하면 근대 철학의 문제는 더 이상 '객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근대 철학이 문제 삼는 것은 그보다는 '어떻게 객체가 가능한가'하는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선이란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등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중요시되어 왔던 질문들은 더 이상 철학의 중심주제가 아니다. 근대 철학의 핵심적 질문은 객체 또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칸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주체성의 문제를 객체의 세계로 이끌어 들인다. 달리 말해 객체에 대한 질문은 주체가 객체의 세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묻는 것으로 전환된다.

   나아가 지젝은 칸트가 주체를 철학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서 급진적인 전향점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인간을 동물적인 쾌락과 신적인 광기 양자에 저항하는 '이성적 존재'라고 파악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비이성적인 '어둠'에 저항하는 이성의 '빛'에 의해 규제되는 존재이다. 반면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 전통에서 인간은 광기와 비이성의 차원을 주체성의 핵심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에 칸트는 인간 내면의 부정성에 해당하는 '악마적 악 das diabolische Böse'에 대해 이야기하며, 헤겔은 인간을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의 밤 Nacht der Welt'에 비유한다. 인간은 더 이상 계몽적인 빛의 존재가 아니라 악마적인 어둠의 존재이다.

  광기, 죽음, 의지 등 인간이 자기 안에서 내몰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들이 사실상 인간을 규정한다는 독일 관념론의 발견은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에 선행한다는 정신분석학의 발견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지젝은 칸트에서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의 주체와 정신분석학의 주체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체의 절대적 부정성은 프로이트에게서 '죽음 충동'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은 단순한 물리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삶 너머에 위치하는 어떤 과도한 충동을 의미한다. 지젝은 인간은 인간 이상인 어떤 것에 의해 삶을 부여받는다고 주장하는데, 인간 이상인 어떤 것의 구체적인 이름이 바로 죽음 충동이다.


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이룸. 2009. 9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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