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시/미국시

'가지 않은 길'은 정말로 가지 않은 길일까? -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소론

by 길철현 2016. 5. 12.

(20230615 수정)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아마도 미국에서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시인들 중의 한 명일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는 30년 전 내가 카투사로 미군 부대에 근무할 때, 나와 같은 방을 썼던 미군의 책상 위에 두툼한 그의 시 전집이 놓여 있었던 것이리라. 이름이 스미스였던 그 키다리 미군은 애독가라고는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단순한 예는 프로스트가 미국인들로부터 얼마나 사랑받는 시인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한 사정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의 시들 중에서도 특히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과 '눈 내리는 저녁에 숲 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등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지금도 미국의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송되고 있다.

 

프로스트는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시인이고, 나 역시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좋은 외국시로 '가지 않은 길'을 번역으로 배웠다. 그때 번역자가 누구였는지, 또 이 시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피천득의 번역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교과서에도 피천득의 번역이 실려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은 대충 "가지 않은(혹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을 했을 것이고, 나도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유희석은 "이 시에 대한 널리 퍼진 통념과 해석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 한 '노년'의 회한과 자부심을 노래함으로써 인생의 보편적 의의를 성취했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영미문학의 길잡이 2 - 미국문학과 비평이론". 창비. 232) 이러한 통념은 민음사에서 이 시인의 번역 시집을 내고 그 해설을 단 정현종의 글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어느 길을 갈까 망설이다가 사람이 덜 간 듯한 길을 택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한숨지으며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얘기할 것이다, 라는 얘기다. 언듯 보기에 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진술인데도 이것이 시로서 공감을 주는 이유는 이 시가 '선택'과 '망설임'이라는 인간의 생의 보편적인 조건 혹은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을 앞에 놓은 망설임에서 우리는 심리적 긴장을 얻으며 선택의 결과로서의 운명은 바로 우리의 삶의 구조인 것이다. 가령 어떤 시인이 회갑기념 시집을 내고 무슨 공로상이라도 받았을 때, 당신이 평생 걸어온 시인으로서의 일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걸어보지 못한 길' 같은 시로서 대답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리고 정확한 대답이 될는지도 모른다.1(프로스트. "불과 얼음". 민음사. 1973. 11)

 

이 시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프로스트의 시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어야 할 터인데, 프로스트의 시에 대한 나의 이해는 앞서 언급한 정현종의 얄팍한 번역 시집, 그리고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에서 "미국 현대시"를 배울 때 접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 시도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펜을 든 것은 이 시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몸 담고 있는 "독학사 칼리지"에서 "미국 문학 개관"을 강의하면서 이 시에 대해 가졌던 몇 가지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에서는 더욱더 심한 고질병처럼 자리하고 있는 모양으로 인터넷에서는 이 시의 오독의 문제를 비평가와 선생들이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자리 잡은 신화는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고만 이유의 일부는 나의 추측이기는 하지만 프로스트가 그런 오독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사실 프로스트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구어적이고 산문적인 문체로 명징하게 이야기를 하듯이 전개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독자가 아니라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것이 그가 대중들의 사랑을  쉽게 획득한 까닭이리라. 그러나, 그의 시는 좀 더 곰곰이 공구할 해 볼 때에는 첫인상처럼 그렇게 명료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 중의 하나가 이 '가지 않은 길'이다. 먼저 시 전체를 옮겨본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iwing how way leads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ges from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4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한 연이 5행, 그리고 각 연의 1,3,4 행과 2,5행이 각운을 이룬 다소 보기 드문  형식의 정형시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삶의 은유로서의 길이라는 정말 진부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고, 시 자체가 길지 않은 만큼 내용도 단순해 보인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선 피천득이 번역한 시도 옮겨보도록 하자.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의 역은 우리말의 결을 잘 살리고 있어서 읽기가 편하다. 게다가 경어체로 되어 있어서 글의 신실함을 좀 더 쉽게 확보하는 듯하다. 그런데, 2연 4,5행의 해석에서의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부분은 구문의 해석이 쉽지 않아, 나 역시도 강의를 할 때마다 곤혹스러웠는데, 적어도 피천득이나 이영걸 등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피천득 역)

 

그리로 지나감으로써

같은 정도로 밟힌 셈인데  (이영걸 역)

 

인간이 소립자도 아닌 이상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1연에서 화자는 '가지 않은(혹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으로 오래 쳐다보았다는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2연에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뭔가 혼선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피천득은 이 혼선을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잘못된 일관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 대한 널리 퍼진 견해는 이러한 잘못된 일관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2연을 좀 더 자세히 논의해 보도록 하자. 화자는 자신이 오래도록 쳐다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여기도 사실 생각할 것이 많다. 화자에게 있어서 이 길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과 마찬가지로 선택한 길도 선택하기 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의 상황이 인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숲길에서의 선택이라면 가지 않은 길을 좀 오래 쳐다보다가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리라. 거기다가 풀이 많고(grassy), 사람이 좀 덜 지나간(wanted wear) 길이라는 인상도 받았기에 그러한 선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다음 부분에서 이러한 인상을 뒤엎는 말이 이어지고 있다. 피천득은 사람이 좀 덜 지나간 길이지만, 이제 화자가 걸어가면 똑같아지지 않겠느냐, 고 해석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과거완료라는 엄연한 시제를 완전히 무시한 오역이다. 다시 말해 그 길은 화자가 걷기 이 전에 이미 화자가 받은 인상과는 달리 거의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지나간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처음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다음 순간(세미 콜론으로 처리한 것에도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 표기법에는 없는 이 세미 콜론이 쉼표와 마침표의 중간 정도의 용법이라고 할 때, 화자의 생각의 전환이 어느 정도의 호흡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화자는 '그 점 - 앞에서 말한 것 - 에 대해서 말해보자면'(as for that), '거기에서'(there) - 이 말이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 사람들이 '지나간 것'은 정말로는 그 두 길 모두 비슷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을 바꾸고 있다. 

 

사람이 별로 다니쟎기론

두 길은 실상 거의 같았네. (김종길 역)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정현종 역)

 

김종길과 정현종의 번역은 피천득의 번역과 같은 엄청난 오류는 없으나 의역이 심하고, 미묘한 화자의 생각의 변화나 혼돈을 제대로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어려운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화자의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3연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두 길은 사실 이 날 아침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채로 낙엽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이 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2연 4,5행에 대한 분석을 존존하게 하고 나니까, 나머지 부분은 다소 수월해지는 느낌이다. 4연에서 화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서 먼 미래에 누군가에게 혹은 혼잣말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정하고 있다.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ges from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화자의 이야기의 시작은 사실에 대한 충실한 반복이다. 그런데 3행 끝에서의 '망설임' 뒤에 화자는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the  one less traveled by)을 걸어갔다고 살짝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 자신이 처음에 그런 인상을 받았으므로 그것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고, 반쯤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한 비약이고 자기 합리화이다. 이것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에서 반 걸음쯤 더 나아간다. 다시 말해 이 화자가 자신이 미래에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자가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는 것, 즉 자기 미화나 과장이나 합리화를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화자는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가능성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 화자가 '자기반성이나 성찰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자기가 걸어간 길과 '걸어가지 않은 길'의 차이점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유사성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이 시의 제목 '가지 않은(혹은 못한) 길'은 어떤 함의를 지니는까? 시인은 간 길이든, 가지 않은 길이든 그것을 신화화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것을 말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로스트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설득력 있는 논의를 펼칠 수 있으리라.              

 

1.  정현종은 이 시의 제목을 걸어보지 못한 길」로 옮겨, 그것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제목에 따르면 두 가지 해석에 다 타당성이 있고(원제목 'The Road Not Taken'을 'The Road Which Was Not Taken'이나 'The Road Which Couldn't Be Taken'을 줄인 것이라고 할 때), 시의 흐름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는 정현종의 제목이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어법에서 '안 했다'(didn't)는 영어에서건 우리말에서건 어느 정도는 '못했다'(couldn't)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널리 통용되는 '가지 않은 길'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때때로 못한을 병기했다. 

2. 앞에 나온 책에 실린 유희석의 글이 설득력이 있는데, 내가 이 시의 이해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2연 4,5행에 대한 번역에서는 피천득의 오역을 답습하고 있다. 

 

-- 더 이상은 미루어 둘 수가 없을 듯하여 이 시를 직접 번역해 보았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

두 길을 다 가보지 못하고

하나만 가야 한다는 게 아쉬워

관목들 사이로 길이 구부러지는 곳까지 

제자리에서 한참이나 바라다보았지.

 

그리곤 다른 길을 택했네, 똑같이 매력적인 데다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도 더 나를 부르는 듯했으므로.
그 점에 대해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밟은 정도는 두 길이 사실 엇비슷했지만.
 
그리고 그날 아침 두 길엔 밟아서 검어지지 않은 
나뭇잎만 똑같이 덮혀 있었지. 
아, 나는 첫째 길은 훗날로 기약했네!
길이 또 어떻게 길로 이어지는지를 잘 알기에 
다시 돌아오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월이 오래오래 흐른 뒤에
나는 한숨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하리라.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이 덜 걸어간 길을 갔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김종길, 정현종 번역 참조)

 

 

 

 

 

 

 

 

 

 

(2016년)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아마도 미국에서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명일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는 30년 전 내가 카투사로 미군 부대에 근무할 때, 나와 같은 방을 썼던 미군의 책상 위에 두툼한 그의 시집이 놓여 있었던 것이리라. 이름이 스미스였던 그 키다리 미군은 애독가라고는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예는 프로스트가 미국인들로부터 얼마나 사랑받는 시인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한 사정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의 시들 중에서도 특히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과 "눈 내리는 저녁에 숲 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등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지금도 미국의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송되고 있다.

 

프로스트는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시인이고, 나 역시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좋은 외국시로 "가지 않은 길"을 번역으로 배웠다. 그 때 번역자가 누구였는지 - 정황상 가장 잘 알려진 번역자인 피천득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 이 시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그리고 - 이것도 정황상이지만 -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닝은 대충 "가지 않은(혹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을 했을 것이고, 나도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유희석은 "이 시에 대한 널리 퍼진 통념과 해석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 한 '노년'의 회한과 자부심을 노래함으로써 인생의 보편적 의의를 성취했다는 것이라"라고 적고 있다. ([영미문학의 길잡이 2 - 미국문학과 비평이론]. 창비. 232) 이러한 통념은 민음사에서 이 시인의 번역 시집을 내고 그 해설을 단 정현종의 글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어느 길을 갈까 망설이다가 사람이 덜 간 듯한 길을 택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한숨 지으며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얘기할 것이다, 라는 얘기다. 언듯 보기에 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진술인데도 이것이 시로서 공감을 주는 이유는 이 시가 '선택'과 '망설임'이라는 인간의 생의 보편적인 조건 혹은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을 앞에 놓은 망설임에서 우리는 심리적 긴장을 얻으며 선택의 결과로서의 운명은 바로 우리의 삶의 구조인 것이다. 가령 어떤 시인이 회갑기념 시집을 내고 무슨 공로상이라도 받았을 때, 당신이 평생 걸어온 시인으로서의 일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걸어보지 못한 길] 같은 시로서 대답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리고 정확한 대답이 될는지도 모른다.1(프로스트. [불과 얼음] 민음사. 1973. 11)

 

 

이 시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프로스트의 시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어야 할 터인데, 프로스트의 시에 대한 나의 이해는 앞서 언급한 정현종의 얄팍한 번역 시집, 그리고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에서 "미국 현대시"를 배울 때 접한 것이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 시도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펜을 든 것은 이 시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몸 담고 있는 "독학사 칼리지"에서 "미국 문학 개관"을 강의하면서 이 시에 대해 가졌던 몇 가지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는 비단 우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에서는 더욱 더 심한 고질병처럼 자리하고 있는 모양으로 인터넷에서는 이 시의 오독의 문제를 비평가와 선생들이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자리 잡은 신화는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고만 이유의 일부는 그냥 나의 추측이기는 하지만 프로스트가 그런 오독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사실 프로스트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구어적이고 산문적인 문체로 명징하게 이야기를 하듯이 전개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독자가 아니라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것이 그가 대중들의 사랑을  쉽게 획득한 까닭이리라. 그러나, 그의 시는 좀 더 곰곰이 공구할 해 볼 때에는 첫인상처럼 그렇게 명료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 중의 하나가 이 "가지 않은 길"이다. 먼저 시 전체를 옮겨본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iwing how way leads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ges from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4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한 연이 5행, 그리고 각 연의 1,3,4 행과 2,5행이 각운을 이룬 영시에서는 다소 보기 드문  형식의 정형시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삶의 은유로서의 길이라는 정말 진부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고, 시 자체가 길지 않은 만큼 내용도 단순해 보인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선 피천득이 번역한 시도 옮겨보도록 하자.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의 역은 우리 말의 결을 잘 살리고 있어서 읽기가 편하다. 게다가 경어체로 되어 있어서 글의 신실함을 좀 더 쉽게 확보하는 듯하다. 그런데, 2연 4,5행의 해석에서의 엄청난 오류 -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 를 범하고 있다. 이 부분은 구문의 해석이 쉽지 않아, 나 역시도 강의를 할 때마다 곤혹스러웠는데, 적어도 피천득이나 이영걸 등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피천득 역)

 

그리로 지나감으로써

같은 정도로 밟힌 셈인데  (이영걸 역)

 

인간이 소립자도 아닌 이상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1연에서 화자는 "가지 않은(혹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으로 오래 쳐다보았다는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2연에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뭔가 혼선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피천득은 이 혼선을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잘못된 일관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 대한 널리 퍼진 견해는 이러한 잘못된 일관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2연을 좀 더 자세히 논의해 보도록 하자. 화자는 자신이 오래도록 쳐다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여기도 사실 생각할 것이 많다. 화자에게 있어서 이 길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과 마찬가지로 선택한 길도 선택하기 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의 상황이 인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숲길에서의 선택이라면 가지 않은 길을 좀 오래 쳐다보다가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리라. 거기다가 풀이 많고(grassy), 사람이 좀 덜 지나간(wanted wear) 길이라는 인상도 받았기에 그러한 선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다음 부분에서 이러한 인상을 뒤엎는 말이 이어지고 있다. 피천득은 사람이 좀 덜 지나간 길이지만, 이제 화자가 걸어가면 똑같아지지 않겠느냐, 고 해석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과거완료라는 엄연한 시제를 완전히 무시한 오역이다. 다시 말해 그 길은 화자가 걷기 이 전에 이미 화자가 받은 인상과는 달리 거의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지나간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처음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 다음 순간(세미 콜론으로 처리한 것에도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 표기법에는 없는 이 세미 콜론이 쉼표와 마침표의 중간 정도의 용법이라고 할 때, 화자의 생각의 전환이 어느 정도의 호흡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화자는 "그 점 - 앞에서 말한 것 - 에 대해서 말해보자면"(as for that), "거기에서"(there) - 이 말이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 사람들이 "지나간 것"은 정말로는 그 두 길 모두 비슷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을 바꾸고 있다.

 

사람이 별로 다니쟎기론

 

두 길은 실상 거의 같았네. (김종길 역)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정현종 역)

 

 

김종길과 정현종의 번역은 피천득의 번역과 같은 엄청난 오류는 없으나 의역이 심하고, 미묘한 화자의 생각의 변화나 혼돈을 제대로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어려운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화자의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3연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두 길은 사실 이 날 아침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채로 낙엽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이 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2연 4,5행에 대한 분석을 존존하게 하고 나니까, 나머지 부분은 다소 수월해지는 느낌이다. 4연에서 화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서 먼 미래에 누군가에게 혹은 혼잣말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정하고 있다.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ges from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화자의 이야기의 시작은 사실에 대한 충실한 반복이다. 그런데 3행 끝에서의 "망설임" 뒤에 화자는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the  one less traveled by)을 걸어갔다고 살짝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 자신이 처음에 그런 인상을 받았으므로 그것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고, 반쯤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한 비약이고 자기 합리화이다. 이것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에서 반 걸음쯤 더 나아간다. 다시 말해 이 화자가 자신이 미래에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자가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는 것, 즉 자기 미화나 과장이나 합리화를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화자는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가능성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 화자가 '자기 반성이나 성찰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자기가 걸어간 길과 "걸어가지 않은 길"의 차이점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유사성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이 시의 제목 "가지 않은(혹은 못한) 길"은 어떤 함의를 지니는까? 시인은 간 길이든, 가지 않은 길이든 그것을 신화화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것을 말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로스트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설득력 있는 논의를 펼칠 수 있으리라.  

 

 

 

 

                                                                             

 

  1. 정현종은 이 시의 제목을 [걸어보지 못한 길]로 옮겨, 그것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제목에 따르면 두 가지 해석에 다 타당성이 있고(원제목 "The Road Not Taken"을 "The Road Which Was Not Taken"이나 "The Road Which Couldn't Be Taken"을 줄인 것이라고 할 때), 시의 흐름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는 정현종의 제목이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어법에서 "안 했다"(didn't)는 영어에서건 우리 말에서건 어느 정도는 "못했다"(couldn't)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널리 통용되는 "가지 않은 길"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때때로 못한을 병기했다. [본문으로]
  2. 앞에 나온 책에 실린 유희석의 글이 설득력이 있는데, 내가 이 시의 이해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2연 4,5행에 대한 번역에서는 피천득의 오역을 답습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