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나날들이다. 탁구를 못 치는 요즈음의 나의 일상 중에서 큰 부분은 점심을 먹고 집 부근, 아니면 차를 몰고 조금 나가서 야산이나 한적한 곳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3월 27일)에는 모처럼만에 달성군 유가읍에 있는 [달창저수지]를 찾았다(주1).
이십 년 전 쯤 동생이 일 년 이상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와 내가 번갈아 동생을 간호했다. 그 당시 지친 심신을 달랠 겸 드라이브를 하다가 우연찮게 들렀던 곳인데, 그 뒤로도 몇 번 더 찾았고 또 이 저수지를 소재로 시도 한 편 썼다. 그냥 커다란 저수지에 지나지 않았던 그 때와는 달리 이곳 역시도 저수지 옆 산을 끼고 도는 산책로와 데크길 등으로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저수지 가꾸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먼저 저수지 둑을 가로질러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 초입 조망이 좋은 곳에 아담한 집이 한 채.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폐가인 듯하다.
요 몇 년 저수지를 찾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 속엔 "가장 아름다운 호수를 만나면 그곳에 집을 짓고 살리라. 아니면 그 아름다움 속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치리라"라는 말이 주문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마지막 날, 청도군을 드라이브하다가 호젓한 호숫가에 홀로 자리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이층집을 만났다. 흰색 외벽에 붉은 지붕을 얹은 외양이 군더더기 없이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저수지 자체는 산 아래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장점 외에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으나(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과 한 그루 큰 나무는 아마도 인공적으로 조성한 듯), 이 집은 집 자체뿐만 아니라 집 주변의 평평하고 널찍한 공간이 절로 욕망에 불을 지폈다(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가?).
저수지를 끼고 도는 산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군데군데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낚싯대를 열 대 이상 설치해 둔 사람, 물가에 임시 거처까지 지어둔 사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저수지는 낚시로 더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저수지는 인근의 다른 저수지들보다 규모가 상당히 큰 탓인지 둘레길이 다 조성되어 있지는 않아서(한 바퀴 다 도는데 두 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산길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차도를 따라 걸어야 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산 아래 형성된 부락을 보면서 겉보기에 여유롭고 고즈넉한 풍경에 막연한 동경을 품기도 하면서.
코로나19 사태가 아무리 엄중해도 봄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그 절정을 향하여 치닿기 시작했고, 이 호숫가 차도를 따라 심어둔 벚나무들도 만개했다.
이 무렵이면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나라는 온통 벚꽃 천지가 된다.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할 수는 없겠으나,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 빛깔로 한꺼번에 피는 벚꽃의 화사함을 이겨낼 꽃은 별로 없을 듯하다. 도로를 따라 지천으로 심겨져 있어서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 꽃터널을 이루는 벚꽃은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나라 전역에서 우리의 마음을 흰 연분홍 빛깔로 물들인다. 그래서일까? 영국 시인 A. E. 하우스만은 꽃 핀 벚나무를 두고 "가장 사랑스러운 나무"라고 노래했다. 또, [러브 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동화같은 사랑 이야기인 [4월 이야기] 첫 부분은 어떤가? 벚꽃이 함박눈처럼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그 장면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다. 도취된 우리는 그 떨어짐이 죽음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벚꽃이 만개한 차도를 따라 걷던 나의 귀에 좀 먼 거리에서 차들이 고속으로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근에 고속도로라도 새로 생긴 것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이곳의 매력은 반감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도로가 이 부근에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 고압선이 우는 소리인가? 잘은 모르지만 고압선에서 소리가 잘 나지도 않고 바람이 세차게 불 때 나는 소리도 이런 종류는 아닌데. 시간이 지나도 그 소리는 사그러들지 않았고, 내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갔다.
조금 더 가자 데크길이 나왔고 갑갑함을 견디다 못해 차를 몰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그러다 어느 벚나무 아래에 잠시 걸음을 멈춰섰던가? 활짝 핀 꽃잎 사이로 그 때까지 눈에 띄지 않던 벌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꿀을 따모으느라 붕붕 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들려왔다(그 전에 지름길을 찾느라 나는 차도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고 어느 순간 내 궁금증을 자극하던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그 사이에 나는 궁금증의 고삐를 놓아버린 듯하다). 벌들이 내는 소리는 내가 들었던 소리와 흡사했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벌들의 날개짓 소리가 소음으로 여겨질 정도의 소리를 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또 다른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좇아 고개를 돌려보니 드론이 요란스레 저수지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 이 작은 벌들의 소리일까? 나는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며칠 뒤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오설지]라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한 바퀴 돌다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곳에도 벚꽃이 만개해 있었고, 그 활짝 핀 꽃잎들 사이로 벌들이 꿀을 따모으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날개짓 소리가 고요하기 짝이 없는 호숫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먹고 사는 일의 가열참에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주1) 달창은 그럴 것이라는 짐작처럼 달성군 소재의 이 저수지가 창녕군과 인접해 있어서 이 두 군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용어와 기표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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