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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이야기

천리안 모임 후에 적은 일기 (1995년 5월 14일자)

by 길철현 2016. 7. 3.

(1995년 무렵에 나는 "천리안"이라는 인터넷 동우회에 소속되어 한 달에 한 번 정도(그보다는 더 자주 만난 것도 같은데) 한성대 근처 태극당 건물 3층에 있는 탁구장 - 성북 탁구장?이었던가 -에서 모임을 가졌다. 친하게 지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 동안 탁구를 같이 쳤던 사람들이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얼마 전 구일 탁구 클럽 리그전에 같다가 오랜만에 진성후 씨를 만나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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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일상적인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을 많이 만난 날이다. 나의 침묵은 벗어버릴 수 없는 천성인지, 나는 또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다섯시쯤, 서울 탁구 회관에 도착하니까 류재헌이 보였다. 현재 천리안 탁동회 부시삽을 맡고 있는데, 지금 방위 복무 중으로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렸다. 전번 랭킹전 때 21로 이겼었는데, 어제 시합에서는 첫 두 세트를 내리 내주고 말았다. 둘째 세트에서는 듀스까지 가서 지고 말았다. 그 다음 세 세트는 내리 이겼지만, 한 마디로 내 파이팅이 좀 부족했던 게임이었다. 내 드라이브에 파워가 덜 실린다는 걸 너무 의식하지 말고 선제 공격을 잡아서 시합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 다음은 백록회 1장 되는 사람과 시합을 하였는데, 1세트는 듀스까지 가서 간신히 이겼지만(2019로 뒤지다가 드라이브가 네트 맞고 넘어온 걸 조심조심 위로 들어올리고, 다시 스매싱한 공을 받아낸 게 승리의 원인이었다.), 2,3 세트는 큰 점수차로 지고 말았다. 나중에 백록회팀과 우리 천리안팀이 친선 게임을 했는데, 50으로 완패당하고 말았으며, 나는 또 이 사람과 만나 시합했다. 첫 세트는 내주고 둘째 세트는 상대방이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쉽게 이겼다. 세째 세트도 밀려나가다가 1916 상황에서 상대방 서브를 넘겨 주었다. 이판 사판이었다. 어차피 진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칠 필요가 있었다. 첫 서브는 내가 선제를 따내 득점, 다음 서브는 상대방의 미스로 득점, 1918까지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다음 서브 상대방 3구가 네트를 맞고 넘어오는 바람에 패색이 짙어졌다. 다시 내가 한 포인트를 보태 2019 상황, 리시브를 하고 3구 공격을 맞받아 쳤는데, 다시 그 공을 상대방이 쳐 넘겼다. 탁구대에서 멀리 떨어져서 롱 랠리 상황이 될 판이었다. 나도 있는 힘껏 그 공을 쳐 넘겼는데, 다시 공이 넘어왔다. 이걸 백핸드로 그냥 쳤으나 네트에 걸리고 말았다.

재헌이가 충분히 돌아서서 칠 수 있었는데, 그걸 왜 백으로 치느냐고 힐난했다. 그렇다. 펜홀더의 장점은 포핸드인데, 포로 칠 수 있는 걸 굳이 백으로 친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합을 풀어나가는데 큰 교훈이 되리라는 건 분명하다.

천리안 사람들과 시장에 가서 분식으로 저녁을 때우고는 박영희 님 집에 놀러갔다. 이 다음부터가 일상에서 벗어난 일이다. 먼저 새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한 번 나열해 보자. 나이 순으로 나열해 보면 박영희(일명 비보라), 호칭은 생략하고, 진성후(88, 나이는 28, 조선 대학교 졸업, 공대 쪽인듯함), 류재완(26, 금속 공예과 졸업, 보석 감정 연구소에 근무), 이상호(25, 철학과 학생), 김태현(91, 24, 경희대 사학과 재학), 류재헌(부시삽, 22) 들이다. 모두 다 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인물로 특히 궁금한 것은 비보라 님(이 호칭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따르도록 하자.)이었다. 나이는 외모와 여러가지 정황을 합쳐볼 때 30대 중반인 듯 한데, 무엇하는 여자이길래 혼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비밀이라고 했지만 살고있는 곳도 탁구장과 한 건물 내에 있는 아파트였다. 괜히 나의 못된 성욕만 자극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편집 일을 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녀의 정체가 무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사들고간 맥주와 양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재완, 상호, 재헌은 자고, 영희, 성후, 태현, 나 이렇게 네 명이서 이야기를 했다. 성후 씬 인상이 날카로운 편인데, 겉보기와는 달리 농담을 잘했다. 그리고 전형적으로 대학 생활을 한 인물 같았다. 학교 공부는 뒤로 밀어두고, 동아리 활동이나 선후배 관계에 중점을 둔 생활을 한 듯 했다. 태현 양은 젊다는 자체 만으로 나의 호기심을 끈 인물인데, 자신의 몸무게랑 왕성한 식욕을 자랑함으로써 이미지를 약간 구겼다. 하지만 성격이 밝고 꾸밈이 없어서 어두운 구석이 없는 아가씨라는 점이 호감을 사게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입은 잘 떨어지질 않았고, 나중에는 부질없는 이야기를 뭐 그리 해대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태현 양에게는 중국에 관해서 많은 걸 배워야 할 것이다.

영희 님 집을 나선 건 새벽 4시 경, 다른 사람은 모두 자고 있었고, 성후 씨와 나만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