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소설 자체보다 홍상수 감독의 충격적인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원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나 역시도 홍상수의 영화들을 재시청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 작품을 집어 들고 잠자기 전에 조금씩 읽어나갔다. 그런데, 소설과 영화는 거의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이름만 좀 바꾸었다면 관련성을 완전히 지울 수도 있었을 듯하다.
제목의 "낯선"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구효서는 통상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만남을 갖게 된 두 남녀의 이야기를, 김효섭과 강보경의 각각의 시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호흡은 느리고, 소설가인 김효섭(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작가인 구효서를 그대로 연상시킨다)은 몇 번의 연애 뒤에 자신의 아이를 잃은 임정화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지만 그야말로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이 여인이 돌연사하는 상흔을 안고 있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민재라는 여성이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평범한 주부로 제시되는(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보통 볼 수 있는 그런 남편이 아니다) 강보경은 뜻밖의 어려움을 두 번 겪게 되고 그때마다 김효섭의 도움을 받는다(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는 있기 힘든 우연이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의 강렬한 고리를 느끼면서도 강보경이 유부녀라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선을 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불륜을 저지른다.
구효서가 이 작품 전체에 걸쳐 애써 항변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의, 통상의, 혹은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런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제3자의 시각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강보경의 남편의 태도이다. 통상적인 질투나 분노에 휩싸이지 않고 아내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태도는 정말 보기 드문 그런 것이다.
정신분석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오이디푸스의 변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구효서는 그 이상, 혹은 삶의 불가해함, 인간관계의 불가햄을 추적해 보려는 시도를 해보려 했다고 말할 것이다. 소설적으로 특히 재미있다거나 심오함이 느껴졌다고 보기는 힘든 작품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주제를 놓고 풀어나가는 작가의 뚝심에는 놀라운 데가 있다.
올해 초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그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풍경소리]를 읽었는데,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작가로서 그의 성장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30년의 공력은 그가 천재성이 번뜩이는 작가는 아닐지라도 꾸준히 천착해 온 작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참고]
구성
김효섭(임정화) - 강보경 - 민재
58년 생
[인용]
17) 외계인이 토해놓은 가래
26) 나는 내가 그녀에게 하나의 환상이며 꿈이기를 바랐다. 자유이길 바랐다. 생가 같아서는 그녀와 밤낮 함께 있으며서 기력이 다할 때까지 섹스를 하고, 마른 밥과 잠으로 육신을 추스린 뒤 다시 섹스를 하고, 그러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싶었다.
33) 그 나이에도 그런 걸(마스터베이션) 하는구나. (37살) /34살
41) 남편 중역
53) 도시는 밤이 제 얼굴이다. 낮은 죽음이고 잔해다.
80) 중년의 무미건조함 - 34살인데
83) 이미 저는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영혼 속에 남아 있던 여분의 정열과, 건강하고 뜨거운 육신을 깡그리 바쳐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 또한 지난 세월의 우울한 기억과 회한들을 한꺼번에 불사르며 저를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97) 영화를 보다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괜시리 힘들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습니다.
104) 혼돈 자체가 질서가 되는 세상
104) 무엇보다도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세상을 지독히도 희구해 왔다는 제 자신의 갑작스런 고백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124) 어떤 일이 있어도 생명을 만들지 않을 거예요, 난 -- 민재
136) 사랑이 뭐길래 이토록 한 사람의 생애를 꼼짝없이 붙들어매는 걸까요.
146) 운명적인 만남
162) 미우라 아야코 - 빙점
174) 후배와의 무자비하고 무목적적인 성행위
3.
189) 좋다고 따라다니던 남학생들이 저한테 모두 화를 냈습니다. 그들은 터무니없이 제멋대로 즐거워하고 괴로워하고 흥분하고 따졌습니다.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버럭 화를 내며 제 곁을 떠났습니다. (무향화)
208) 우스운 것이 사랑이지만, 언제나 치명적인 것이 사랑이다.
209) 임정화 - 첫 결혼에서 얻은 아이를 잃음.
215) 부부가 된 날 자다가 죽음. 관계도 갖지 않음.
241) 원초적인 결락
266) 한순간 스윽 하고 기요틴의 칼날이 떨어지며 목을 탁 치는 것 같은.
282) 나는 강보경이 아닌, 내 안의 어떤 익명의 여인을 만났던 것은 아닌가 하고.
294) 저는 낡은 점포들이 장사진을 치고 북새통을 이루는 거리를 걷습니다. (김효섭이 강보경 남편에게)
298) 내가 다시 본 건 그녀였다. 강보경. 분명 그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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