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녹천에는 똥이 많다, 문지, 1992, 1993
*진짜 사나이
[내용] 87년 ‘6월 항쟁’ 중에 소설가인 나는 노동자 출신인 장병만과 같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다. 장병만은 나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지 식사를 청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사정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소설가인 나를 굉장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민주화라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 나는 노동자가 ‘죽어라고 노동하고 고생하면서도 자기가 일한 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시정하는 것도 바로 민주화’라고 대답을 해준다. 이후 장병만은 부지런히 시위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데모에 가담한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나의 후배 한 명은 새로 창간할 잡지에 장병만의 이야기를 싣고 싶은데 그 일을 내가 맡아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이후 그는 명동 성당의 농성장을 지키기도 하고, 이한열의 장례식장을 사수하는 데에도 앞장을 섰다. 그러다가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술자리에서 손님과 시비를 벌이다가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한다.
나는 그의 구속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의 아내로부터 그가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시위 현장에 뛰어들고부터는 집안 사정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몸도 안 좋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나는 그 집에 쌀을 좀 들여보내 준다. 그 이후 장병만을 만나서 나는 집안도 좀 생각하라고 충고를 하다가 오히려 그에게 뺨을 맞고 욕설을 듣는다. 나는 이때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설명하지 못할 쾌감 같은 것까지(31)’ 느낀다.
2년 뒤 나는 장병만 씨를 노점상들의 시위 현장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몸과 리어카를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그 상태로 경찰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평] 독재 정권이 국민들의 ‘민주화 대투쟁’으로 물러났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여당이 집권함으로써 독재 정권의 고리를 끊지 못한 80년대 말의 정치 상황을 장병만이라는 한 노동자를 등장시켜 되짚어보고 있는 작품. 이 작품집 전반을 흐르는 분위기가 ‘인간에 대한, 혹은 인간 삶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와 ‘낙관주의’라고 한다면([녹천에는 똥이 많다] 같은 작품은 좀 더 복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비록 대선에서 패배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경제적 성장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로 들어서고 있다는 기대, 그리고 이창동 자신의 기질(이 낙관적인 기질은 이후 그 보다 더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대한 성찰’이라는 이창동의 정신적인 성숙에 따른 변화와 뒤섞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 부분은 언어를 좀 더 갈고, 또 좀 더 추찰해 보아야 할 것이긴 하나 현재의 느낌이 그러하다) 등과 맞물려 이 소설 역시도 보잘 것 없고 힘겨운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자신감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 경우 소설은 현실에 좀 더 공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작가 자신의 생각에 이끌려 갈 위험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한 눈을 잃어버릴 수 있다. 서지문의 지적이 어느 정도 효용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다. ‘처음 그[장병만]의 이야기를 잡지에 실으려고 했던 그 후배는 지금은 어느 유명 여성잡지사에 취직하여 민완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중(34)’이라는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가벼운 처리일 뿐 아니라, 작가의 편향성을 드러내고 있는 증거일 수 있다. 이창동이 소설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거나, 혹은 그 자신이 자신의 소설에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던(‘오랜만에 책 한 권을 꾸미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될 만큼 별다른 감회가 없다(300)’) 이유는 그가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용천뱅이
[내용] 김영진은 아버지가 고정간첩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담당 검사의 말이 처음에 그의 아버지를 부른 것은 혐의를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고인 정도였는데, 아버지 자신이 자신도 간첩 행위를 했다고 우기기 때문에 구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함께 체포된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는 간첩 행위와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굳이 우긴다는 것이었다.
김영진의 가족은 좌익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하루하루의 목숨을 유예하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날’을 보내야 했고, 아버지 대신 가정을 책임져 온 어머니의 뜻을 따라 학교 선생이 되었던 것이다. 김영진의 동생은 노동자 선동 혐의로 수배를 받는 상황이고, 그의 고모 또한 남편이 좌익이었던 탓에 남편과 삼십여 년 전에 생이별을 하고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왔던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고 김영진은 애를 쓰지만, 이념대로 살지도 못하고 가정의 안락을 꾀하지도 못한 채 용천뱅이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가 더 이상 용천뱅이 신세로는 살 수 없다는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평] 이 작품에 등장하는 김영진의 아버지는 [친기]의 나의 아버지와 많이 닮아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신봉했던 사람이지만, 자신들의 이념이 실패로 돌아가자, 절망한 상태로 삶을 방기한 상태로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진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 김영진의 아버지가 간첩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것으로나마 자신의 실패한 삶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인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뭔가 기댈 것 하나 없는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창동은 크게 말하자면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속에서 소설이나 영화를 짜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상은 언제나 현실 앞에서 패배하지만, 이상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이창동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다시 말해 ‘어떠한 삶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고 크게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요약은 그러나 너무나 광범위하다.
다시 이 작품으로 돌아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본다면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뒤 삶을 방기한 상태로 지내는 아버지와,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어머니와 김영진,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편이면서 현재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동생 효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일가족은 크게 보자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도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되풀이 된다. 이 작품에서 이창동은 이 대비되는 두 삶을 극한으로 대립시키지도 않고, 또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을 아들인 김영진은 김영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그 초점이 아버지,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에게 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창동의 소설이 그렇게 흡인력이 없는 것은 우리 소설의 리얼리즘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읽어본 이야기.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소설의 소재의 측면에서 좀 더 폭을 넓힌다면, 또 좀 더 깊게 인간을 파고든다면, 인간의 이성적인 면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인 부분까지도 다루어 본다면, 그런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운명에 관하여
[내용] (나라는 인물이 소설가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나는 고아 출신이다. 이름은 김흥남이라는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나지만, 육이오 무렵에 부모님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원장에게 늘 얻어맞으며 자라던 나는 학교에서 [두꺼비가 된 왕자님]이라는 연극의 왕자 역을 맡게 되었다. 공주 역을 맡은 아이는 아주 예쁘고 부자인 선주의 딸로 학예회 날 당일에는 나에게 진짜 입맞춤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아이가 입맞춤을 하려는 순간 정전이 되고 만다.
나에게는 계속해서 불행이 닥친다. 어떤 집의 양자로 들어가려는 것도 마지막 순간에 성민이라는 다른 아이에게 그 행운을 빼앗긴다. 그리고, 여관에서 일을 하며 부지런히 모은 돈도 사기꾼에게 걸려 날려 버린다. 그러다가 그 사기꾼을 다시 만나 칼로 그를 찔러 버린 탓에 감옥에 가게 된다. 하지만 나에게도 여복은 있었는지, 옆방에 살던 술집 아가씨가 그에게 면회를 오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방영해 주던 어느 날, 감방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고아원 동기 성민이가, 자신이 몰고 있는 차의 사장이 아들을 찾고 있는데, 나에게 그 아들 역할을 하라고 꾄다. 나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사장을 만나는데, 진짜 자기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다음 날 다시 찾아오라고 했는데, 나의 아버지는 그 사이에 그만 의식을 잃고 죽고 만다. 나는 사장이 진짜 친아버지라고 주장해 보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나는 이 일로 우울증에 걸렸다가 성민이 훔쳐 나온 아버지의 시계를 갖게 되자 차츰 병에서 회복하게 된다.
[평] 이 의도적으로 작위적인 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창동은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일까? 이런 이야기가 과연 진지한 소설로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창동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의 솜씨를 한 번 시험해 본 것일까?
이 작품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다. (080817)
*녹천에는 똥이 많다.
[내용] 준식은 급사 출신으로 야간대학을 나와 정교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서무과에 일하던 상고를 나온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또 서울 변두리에 아파트까지 얻은 상태였다. 이러한 그에게 십여 년 동안 소식이 없던 이복동생 민우가 찾아온다. 아내는 민우의 등장을 처음에는 아주 못 마땅해 한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이 준식을 불러내 교사들이 전교조 활동을 하지는 않는지, 또 방학 동안의 보충 수업에 반대하지는 않는지 이런 것들을 묻는다. 이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준식은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아파트의 경비실 앞에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때 ‘삼십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딸아이의 양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부부가 사실은 자신의 아내와 동생 민우라는 걸 깨닫는다. 그의 아내와 동생이 그 사이에 친해 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민우에게는 다정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에게는 더욱 쌀쌀 맞게 굴었다. 사실 준식은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잘 생긴 민우에게 열등감을 많이 느꼈던 것이다.
가족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는 준식에게 직장인 학교에서도 스트레스가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형사마저 동생인 민우가 운동권으로 지명 수배중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학교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준식은 어머니가 장사를 할 때 하던 행동을 흉내 내면서 깽판을 놓는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준식은 아내의 매정한 태도와, 또 민우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들을 대놓고 공격하자, 아내는 집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이때 민우가 끼어들어 아내에게 뭔가 충고를 하자, 화가 난 준식은 밖으로 나가 경찰에 신고를 해버린다.
이때 민우 역시도 자신 때문에 집안에 분란이 일어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집을 떠나기로 한다. 떠나는 민우를 바래다주는 준식. 그러나 역에서는 형사들이 민우를 체포하러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갈등을 하면서도 결국 역에까지 이르렀을 때 민우가 눈치를 채고 도망을 가지만 결국에는 잡히고 만다. 정신없이 달아나던 준식은 자신이 똥구덩이 위에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얼른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평] 이번 작품집의 표제작인 이 소설은 준식이라는 한 소시민(혹은 현실주의자)이 안주하고 있던, 아니면 지켜 나가려 애쓰고 있던 자신의 성이, 민우라는 이복동생(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의 등장으로 인해, 자기 만족과 허위에 지나지 않는 것임이 드러나는 과정을 밀도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기반이 위기에 처하자 준식은 동생을 밀고하는 비열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결국은 자신이 깔고 앉은 똥구덩이와 같은 것이기에 처절하게 울지 않을 수 없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메시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준식과 민우의 대립, 준식과 아내의 대립에서, 자신의 조그마한 성이나마 지켜나가려는 준식의 몸짓이 얼마나 힘겹고, 또 얼마나 구차한 것인가는 그가 울고 있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느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못할 그 자신만의 슬픔이 그를 울게 만들었다. (181)
사실 인간의 삶이란 다수의 현실주의자들과 소수의 이상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준식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의 아내로부터도 전혀 이해를 받지 못하고, 혹은 아내와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늘등(燈) (080917)
[줄거리]
신혜는 이념 서클에 들어 다른 학생들과 공부를 하던 중, 학내 모임을 주동한 자리에서 학교를 비판(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민주화를 요구)한 죄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딸이 졸업하여 선생님이 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신혜 어머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신혜는 집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다가 야학에 나가는데, 거기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가출하고 만다.
가출한 신혜는 강원도의 탄광 지대에 다방 종업원으로 취직을 한다. 신혜는 80년도 이곳에서 일어난 대규모 광부 폭동 사건의 주동자인 김광배와 친해진다. 그런데, 김광배는 그 사건 이후 경찰서의 프락치 노릇한 것으로 낙인이 찍혀 있어서 다른 광부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김광배는 자신과 친해지고 싶다는 신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강요하다가 거부당하자, 신혜의 동료인 설양에게 접근한다. 김광배를 좋아하게 된 설양은 그가 신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신혜를 ‘위장취업자’로 신고한다.
경찰서에 끌려온 신혜는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거짓 진술서에 날인을 한다. 하지만 그녀를 고문한 형사는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진술하라고 한다. 신혜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이어 더 심한 고문이 이어지고, 남형사라는 사람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성고문을 시작한다. 그가 신혜를 책상 위에 눕히고 그녀를 강간하려는 찰라 신혜는 자신의 손에 잡힌 유리 재떨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밖으로 달아난 신혜는 누군가와 부딪히고는 정신을 잃는다.
경찰에서는 밖으로 무슨 소리가 나갈지 몰라 이쯤에서 사건을 유야무야시키고 그녀를 풀어준다. 풀려난 신혜는 광배와 밤을 보내고, 또 다방에서 받은 월급 40만원을 죽은 광부의 조의금으로 내어 놓는다.
[평]
이 작품은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의 부조리에 눈 감고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한 젊은 여대생이 교내 집회를 주동한 죄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로 인해 다시 먼 광산촌으로 와서 다방 종업원 노릇을 하다가 ‘위장취업자’로 몰려 경찰에 고문을 당하는 과정을 회상과 심문의 형식으로 전개시킨 작품이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한 젊은 여성에게 닥쳐온 독재정권의 엄혹함은 전형적이면서도 다소 극단적인 형태, 즉 성고문이라는 형태로 제시되는데 반해, 그 이후의 전개는 ‘낭만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 듯하다. 광배라는 인물과 밤을 보낸다는 설정은 그 방금 전에 강간을 당할 뻔한 여성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마도 이 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이창동을 비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거기다 자신이 받은 월급을 몽땅 다 조의금으로 낸다는 것도 다소 우스꽝스럽다.
이창동의 소설이 이러한 형식으로 전개된 것에는 80년대 말의 시대적인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도 같지만, 이 작품은 이창동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인 인식이 드러나는 그런 작품이라고 본다. 이러한 인식이 이 작품에 서술된 아름다운 묘사(새벽이었다 이후 289)가 주는 감동도 반감시킨다.
*이창동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랄까, 낙관주의가 다소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소설에서의 이러한 낙관주의는 영화에서는 좀 더 가라앉은 모습으로, 좀 더 냉정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그러나 냉혹한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보자면 다소간 낭만주의적이라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성민엽-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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