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에 대한 관심은 나의 경우에는 [박하사탕](1999)이 던진 강렬함도 중요하지만 [밀양](2007)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의 삶의 의미를 묻는 그 절절함이 더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버닝]은 현시점에서의 청춘들의 혼돈과 불안과 분노를 밀도 있게 포착한, 그와 동시에 모순과 다층성을 담고 있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다. 2008년도에 나는 이창동 감독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의 소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소설집 두 권에 대한 정리는 마쳤으나, 영화에 대한 평은 데뷔작인 [초록물고기] 밖에 적지 못했다. 중단된 그 작업을 [버닝]이 던진 충격파와 함께 다시 재개한다.]
가. 전리(戰利) (83년)
[내용]학생 운동을 하다 수감된 김장수는 간경변 때문에 형집행이 정지된다. 대학 친구와 후배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한 그는 하지만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대학 후배이자 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구본수는 장수의 옛애인인 오미자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은 만난다. 오미자는 장수가 수감된 후, 미국인 기업가와 결혼했다가 지금은 혼자 있는 듯했다. 구본수는 오미자를 유혹하여 그녀와 호텔에서 동침하게 되지만, 두 사람이 관계를 맺기 직전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김장수의 뼛조각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에게 얻어맞고 헤어지게 되고 만다.
[평]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작품은 작가 나름대로 굉장히 공을 들였던 작품이자, 그의 풍부한 문학적 표현력과 문장이나 구성에 있어서의 단단함을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다. 당시 검열 때문에 김장수의 학생 운동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작품의 분위기는 당시의 암울함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플래시백 기법’의 지나친 사용은 독자를 다소 짜증스럽게 하며, 특히 작품의 화자인 구본수가 김장수의 뼛조각을 호텔 밖으로 던지는 장면에서의 작품의 마지막 구절 ‘그것은 이 세상의 무서운 잠을 단숨에 날려보낼 어마어마한 폭음이었다’는 작품의 의미나 효과를 증폭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작품의 폭과 긴장을 축소시키는 아쉬움을 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뼈를 밖에 내던졌을 때의 실제 상황 ‘깊은 물 속에 빠져들어간 듯 바닥 없는 정적속으로 가라앉아갔다’에서 멈추는 것이 당시의 암울함이나 절망, 좌절 등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마지막 부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다소 도식적이고 작위적이다.
나. 꿈꾸는 짐승(83년)
[내용]시청 청소과의 임시직원인 대기는 자신이 몰던 노새가 차에 치여 죽는 바람에 자신이 머물고 있던 도시를 떠나려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고 지내던 공장 근로자인 기동을 만나 술을 한잔한다. 기동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청년인데, 그만 장발단속 경찰에 걸려, 자신의 자랑거리인 긴 머리를 깎기고 말아 기분이 대단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술을 한 잔 한 뒤 대기는 기차표를 사러 역으로 갔으나 표가 매진된 상태였다. 따라 나왔던 기동은 여자를 꼬신다는 것이 그만 창녀를 부르고 말았다. 평소 발기가 되지 않던 대기는 이 창녀를 통해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게 된다.
[평]신흥 공업 도시에서 살아가는 두 노동자의 하룻밤을 그려낸 작품. 대기는 ‘노새의 발기’로 대변되는 ‘이룰 수 없는 욕망, 꿈’을 지닌 인물인데, 그 노새의 죽음으로 자신의 그런 발현되지 못한 욕망을 접고 이 도시를 떠나려 한다. 기동 또한 자신의 성적 매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를 깎여 자신의 욕망이 권력에 의해 제지당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대기를 구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창녀인데, 이 부분은 다소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다. 욕망의 실현을 결박당한 채 살아가는 하층 계급 인물들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080803)
*빈집(85년)
[내용]자신이 근무하는 회사 사장의 조카뻘인 사람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맡긴 대저택의 방 두 칸을 쓰게 된 상수 내외는 도둑이 들어올까 늘 노심초사이다. 회사에서도 ‘생산주임’인 상수는 간부들과, 평 노동자 사이에서 늘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박용팔이라는 인물이 취직을 했는데, 이 인물이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고 보상을 청구’했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술을 먹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다가 다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후에 이 일과 연루된 직원들이 모두 해고된다. 그런데, 박용팔은 사실 회사 측에서 강성 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위장 취업시킨 인물이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상수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은 지금 까맣게 모르고 있으나 세계 전체가 공모하여 미구에 무엇인가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 가슴속에 점점 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189)
또, 도둑이 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파이프와 플래시를 들고 나갔던 그는 오히려 도둑으로 오인 받아 경찰서에 끌려가기까지 하고, 경찰서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평]이창동의 눈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가있다. 이 작품은 회사의 하급 간부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대저택에 살고 있는 상수라는 인물이 겪는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체적인 흐름은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고 기만적인 술책으로 노동자의 단결 의지를 와해시키는 경영자에 대한 비난,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 경영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고 마는 상수라는 인물과, 또 자신들의 주제에 맞지 않게 대저택에 살게 되는 그와 그의 아내가 겪는 정신적 고통을 천착하고 있다.
*수퍼스타를 위하여(85년)
[내용]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김씨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아들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미국인 소유의 아파트에 살면서 ‘수퍼스타’라는 개를 돌보게 된다. 그에게 고층아파트 꼭대기 층에서의 생활은 마뜩찮은데다가, ‘수퍼스타’라는 개와도 친해지지 못하고, 자신을 물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잠을 못 이루고 있던 어느 날 밤, 아이의 울음소리에 밖으로 나간 김씨는, 그 아이가 며칠 전에 보았던 ‘가출아’라는 것을 알고, 경찰이 파출소로 끌고 가려는 걸 자신의 아파트에 오도록 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수퍼스타와 금방 친해졌고, 또 자기 집인 양 마음대로 하더니만 급기야는 야한 비디오를 틀고 만다. 쫓아 버리겠다는 김씨의 위협에 아이는 개를 풀어놓고, 김씨는 이제 아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김씨의 아들로부터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은 경비원이 아파트의 방문을 따고 들어가니 방안은 온통 어질러져 있었고, 김씨는 실성한 상태였다.
[평]이 작은 작품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명백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한국의 미국화(그것은 어떻게 보면 한국의 반식민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김씨로 대변되는 구세대는 정체성에 커다란 위기를 맡게 된다. 이와 반대로 가출 소년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이나, 식인종 이야기, 또 그가 수퍼스타와 쉽게 친해지고, 포르노 비디오를 보고 비속한 성적 노래를 거리낌 없이 부르는 것은 미국 문화에 동화된 아이의 모습, 그것은 천박함과 당돌함 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가난에 찌든 아이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밤중의 일은 모두 환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080806)
*춤(85년)
[내용] 가난한 직장인인 상철은 집 마련의 꿈을 안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아내를 끈덕지게 권유하여 바캉스를 가게 된다. 대천 앞바다로 놀러간 이들은 거기에서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아내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상철은 지극히 현실적인 아내가 방안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을 몰래 본 적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상철은 사실 바캉스를 오자고 끈덕지게 졸랐던 것이다.
2박 3일의 바캉스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돌아와 보니 도둑이 들었는데, 집에 훔쳐갈 물건이 없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평]강퍅한 현실을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 단순한 구조의 소품. 현실적인 아내의 모습 안에 감춰진 열정이랄까, 현실에 대한 부정이랄까, 하는 것이 그녀의 비밀스런 ‘춤’에 담겨져 있다. 상철이 그녀에게 내뱉는 ‘당신이야말로 돈에 미친 여자야’라는 말은 일상의 강퍅함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080806)
*친기(親忌)(85)
[내용]제대를 한 나는 임종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빚쟁이들 때문에 앞날이 망막하다. 이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흔 줄의 웬 사나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나의 이복형이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좌익 활동을 하셨는데, 첫 번째 부인과 아들을 내쫓고, 나의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빈한한 삶을 어머니의 손에 맡겨 둔 채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하시다가, 선산이 수몰되는 바람에 받게 된 보상금으로 사업을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또 곧이어 부도가 났던 것이다. 이복형은 그 때 쫓겨난 그의 어머니가 이후 곧 돌아가셨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 제사’라도 지내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의 누나는 아버지와 외삼촌이 이복형의 어머니의 신고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이복형의 어머니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병이 위중한 가운데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누나를 질책하면서 제사 준비를 시킨다. 그리고, 이복형에게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한다.
[평]이창동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 중의 하나가 이 ‘혁명에 실패한 아버지,’ 또 ‘그에 따른 절망감으로 가족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아버지’라는 것을 ‘전리’에 이어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 이창동의 의식은 시대적 비극이 개인사적인 비극과 연결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시대적 비극 앞에서 개인의 책임의 문제를 묻고 있는 듯하다. (이 부분은 섣부른 단정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지극히 암담하면서도 끊임없이 화해를 모색하는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도 보이는 그러한 작품이다.
*소지(燒紙)(85년)
[내용] 손자가 수상한 사람이 삼촌을 잡으러 왔다는 이야기에 할머니는 놀란다. 그리고 곧이어 시누이가 놀러 온다. 시누이는 오빠, 즉 그녀의 남편의 제사를 지내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좌익 사상을 지니고 있던 인물로, 경찰이었던 시누이 남편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을 했는데, 6*25가 일어나자 연행된 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행불자로 처리하고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당 말기에 남편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는 사기꾼에게 속아 돈을 빼앗기고 강간을 당해 둘 째 아이인 성호를 가지기도 했다.
첫째인 성국은 공무원이 되어 착실하게 살아가는데, 아내가 아이를 낳고는 집을 나가버려 지금은 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동생인 성호가 학생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형사가 그를 잡으러 왔다는 사실을 안 성국은 이 날 밤늦게 들어온 그를 심하게 질책한다. 그녀는 이 상황을 보다 못하고 “싸워래이. 치고 박고 물어뜯고 싸워래이.”라고 고함을 지르자, 성호는 울면서 집을 뛰쳐나간다.
그녀는 손자와 함께 성호가 가지고 온 전단지를 불태우고, 또 앓던 이를 빼면서 두 아들에게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맹세한다.
[평]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 작품은 소설가로서 이창동이 핵심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앞에서도 지적했듯 ‘분단 상황, 혹은 6*25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개인사적인 비극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기도 하고 또 전형적이라고 할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특히 [친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듯)과 그 가족들의 질곡은, 또 현재 사회의 권위주의적 정권(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의 모습 아래 되풀이되는 형식이다(이러한 구도는 [전리]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소설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회의 병리를 파헤치는 이러한 리얼리즘적 기법은 이창동이라는 개인, 작가로서의 그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지는 못하다. 다시 말해 잘 쓴 고만고만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참고
보도연맹(保導聯盟)(다음)
1949년 좌익전향자들로 구성된 조직.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의 구체적인 운용책의 하나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자 또는 전향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이 단체에 빠짐없이 가입하도록 규정해 놓았으며, 그들에 대한 회유와 통제를 쉽게 하도록 했다. 1949년말까지 이 단체의 가입자 수는 약 30만 명에 달했으며, 서울에 1만 9,800명이었다. 1949~50년 이들은 당시 좌익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일부 위장전향자들과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뿌리뽑는다는 정부방침에 의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이 실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때의 실상은 공개된 것이 없다.
보도연맹 사건(다음 위키)
보도연맹 사건(保導連盟事件)은, 1950년에 한국군이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를 포함해 적어도 20만 명 남짓을 살해했다고 여겨지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한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 전향자로 구성된 조직이며,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당시 치안검사였던 선우종원의 증언에 따르면, 연맹원 모집은 주로 좌익 경험이 있는 자들이나, 사상범(양심수)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증언은 엇갈리고 있으며, 내무부(당시 내무부장 장석윤)가 관련이 된 실질적인 관제조직이었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하면, (좌파인사들에 대한 사상 개조 단체였던) 보도연맹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게 될 것을 우려한 한국군이나 경찰 또는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들이 수감되었던 교도소 교도관들이 보도연맹원을 여럿 학살했다. 현재 조사된 남쪽의 학살 보도연맹원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이 되고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오랫동안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에 대한 언급이 금기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 들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다루어지는 등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시체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있다.
*눈 오는 날(87년)
[내용] 한 젊은 여자가 김영민 일병을 면회 온다. 그러나, 그녀는 김영민 일병이 후송되었다는 이야기만 듣는다.
대학을 다니다 군대에 온 김일병이 그 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어린 상병과 같이 야간 보초를 서고 있다. 군대의 모든 것이 김일병에게는 잘 맞지 않다. 사격을 못해서 그는 한 번도 외출을 못 나갔고, 그것으로 중대장에게 항의를 하다가 번번이 고초를 당했다. 사회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온 상병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일병은 자신의 연애 이야기라며 진중 교회에 위문단이 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게임을 할 때 처음 본 여자가 자신의 애인 역할을 하며 마지막에는 입까지 맞췄다는 내용이었다. (김일병을 면회온 아가씨가 바로 이 아가씨였다.) 이 때 철조망 근처에 사람이 왔다. 상병은 그를 쏘아버리려 하는데 김일병은 그 사람이 술에 취한 민간인이라는 걸 알고는 쏘지 말라고 한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상병은 그만 김일병을 쏘아 버린다. 김일병은 상병에게 자살한 것으로 꾸미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죽는다.
[평]단순한 구도의 이 이야기는 ‘군대 문화’라는 것이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그런 폭력적이라는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김일병이 자신의 죽음을 자살로 바꾸는 순교자적 정신은 다소 감상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짙다. 이 작품은 아무래도 이창동이 일찌감치 썼던 그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담으로 한 가지 이야기 하자면, 김일병을 면회 온 아가씨가 위병소의 보초들과 나누는 대화는 [박하사탕]에서 일부 그대로 이용된다.)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돼요?”
“이영숙.”
“주소는?”
“서울이요.”
“서울이 다 아가씨 집인가?”
*끈(87년)
[내용] 김대식의 어머니는 남편을 전쟁 중에 잃고 아들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다. 아들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장성한 김대식은 선을 보지만 번번이 어머니의 퇴짜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어느 날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마음에 든 노처녀와 선을 보게 되는데, 피곤에 지친 보잘 것 없는 여자였지만, 이상하게도 대식은 말을 더듬지 않고 ‘여자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웃음이 피어오르게 할 정도(114)’로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결국에는 결혼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시기는 도를 지나쳐 두 사람의 사이를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급기야 아내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는 아내를 내쫓으라고 종용한다. 대식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자, 어머니는 집을 나가 버린다.
그리고 며칠 후 김대식은 경찰서 대공과로부터 연행해 갔던 아내를 인계해 주겠다는 전화를 받는다. 역시 공산주의자인 아내의 외삼촌이 입국을 했다는 것 때문에 아내가 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평] 원호 가족인 김대식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딸인 아내. 이들 사이의 갈등은 기본적으로는 시어머니의 시기심으로 인해 촉발되는데, 결국에는 이념의 문제로까지 치닿는다. 중간에 낀 대식은 아내를 포용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도 포용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아들 간의 의식*무의식적인 유대 관계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이념 문제라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이면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87)
[내용]기자인 경철은 여배우의 스캔들을 조사하러 전남 광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옆에는 자신이 표를 구해준 할머니가 앉아 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다소 괴팍한 노파이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소주를 꺼내 경철에게 권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버스 내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시킨다. 또 휴게소에 고속버스가 정차했을 때에는 화장실에 갔다가 오지 않아 경철을 애태운다. 급기야 할머니는 소변이 마렵다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세워달라고 하고, 기사가 요지부동 말을 듣지 않자, 고속버스 통로에다가 오줌을 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도 사람들의 무관심함 때문이라며 저주를 늘어놓는다. 보다 못한 한 젊은이가 할머니에게 안전벨트를 채우자 할머니는 졸도하고 만다. 버스가 광주에 도착하자 경철은 사람들에게 할머니가 이렇게 된 것에는 여러분의 책임도 있다고 말하려 하지만 그 말은 자신의 머릿속을 맴돌 뿐이고 다른 승객들을 따라 급히 차에서 내린다.
[평]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광주행 고속버스라는 폐쇄된 공간 내에서 그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인 할머니를 내세워 우회적으로 되새겨 보고 있는 작품. 이야기의 내용은 이 할머니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집중하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그 할머니,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상흔’과 연결되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 잊고 그냥 지나갈 사건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할 사건임을 이창동은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식의 작품의 전개의 [진짜 사나이]에서도 되풀이 되는데, 이러한 기법이 갖는 효과와 약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080814)
*불과 먼지(87년)
[내용] 이 날은 나의 세 살 난 아이가 일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날이다. 학교 교사인 나는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카네이션을 한 다발 사서 아이의 유해를 뿌린 한강으로 가려 한다. 아내는 추도예배를 드릴 것이라고 하며 일찍 들어오라고 했으나 나는 그러지 말자고 반대했다. 택시를 타고 한강으로 가던 나는 아이의 유해를 뿌린 장소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 때 함께 동행 했던 기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친구는 일단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서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 친구와 술을 한 잔 마신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아이의 유해를 뿌린 곳으로 가봐야겠다면서 친구와 헤어진다.
그런데, 일 년 전에 유원지였던 뚝섬의 그 장소는 지금은 거대한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괴로운 마음에 나는 몸이 좋지 않음에도 독한 소주를 마시고, 급기야는 토악질을 한다. 그러다가 나는 그 곳에서 자신의 죽어가는 금붕어를 놓아주려고 온 한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는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분신을 기도한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평]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소설화한 것이어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영화 [밀양]에서 그 때 자신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통과 그것의 의미--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일 것이다--를 다시 한 번 되짚고 있다. (곁가지적인 이야기지만, [밀양]은 그러니까,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와, 이창동 자신의 체험, 그리고 그것이 작품화된 [불과 먼지], 마지막으로 ‘밀양’이라는 구체적 공간을 상정한 영화감독 이 창동의 예술가적 상상력 등이 결합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도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근원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삶과 죽음과, 그것의 의미’라는 문제가 더욱 강렬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이의 죽음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49)’라는 구절이나, ‘세 살 난 아이의 죽음 뒤에 영생과 부활을 준비해둘 수 있다면 어째서 그 아이가 죽도록 내버려두었겠는가(40)’하는 구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작품의 화자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받아야 하는 고통의 의미, 혹은 한 개인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작품의 화자는 아이의 1주기를 맞아 되새기고 있다. 이창동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작품 속의 내가 아이의 1주기인 토요일에 아이의 유해를 뿌린 뚝섬으로 가고 오는 도중에 자신이 겪었던 사건이나 의식의 흐름을 사실적으로 적어나가고 있는데, 취사선택이나 세세한 부분의 각색은 있겠지만, 이창동 자신의 실제 체험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할 때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나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이런 부분이 중요하게 와 닿는다. 영화를 볼 때 토폴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 한 송이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잔인한 것이다. 그것이 지난 일 년 동안에 나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이었다. 한 아이가 죽었는데도, 세상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 (38-39)
생명체의 삶과 죽음, 언어로 구체화하여 말하기 어려움. 아이의 죽음은 나에게 혹은 아내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음에도, 세상은 그 사실에 대해 무심하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잔인한 것’인가? 이 작품에서 아이의 죽음과 대비되는 죽음은 분신한 서울대생이다. 그의 죽음은 사고나,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의도적인 것이다. 80년대 말의 민주화 운동에서 우리는 자살한 많은 사람을 보아왔다. 그 자살은 힘없는 자의 힘 있는 자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시도가 과연 그들의 목숨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하는 문제는 따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 작품을 사적 체험의 기록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이 지닌 상징성을 좀 더 추적해 본다면, 아이의 유해를 뿌린 한강변의 뚝섬이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1년 전 그곳은 유원지였으나, 지금은 거대한 공사장으로 변해버렸다. 이 공간의 의미를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는 정도로 단순화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공간의 변모는 아이의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이때 등장한 소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잘 알기 힘들지만, 죽어가는 금붕어를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죽게 해준다는, 금붕어의 원래 고향은 아니지만 그 고향을 대체할 수 있는 공간인 강에서 죽어가게 해준다는 소녀의 마음 씀씀이,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라는 말 등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꿋꿋이 살아가라’는 의미로 바꿔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창동이 신춘문예 당선작품인 [전리]에서도 그랬듯이 조금은 지나친 의미부여가 엿보인다.
그러나 나는 오한이 들린 것처럼 내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뽑히는 듯한 고통과 동시에 견딜 수 없이 뜨거운 희열 같은 것이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금 나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 사이로 온몸이 불길에 싸여 타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러나 그것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 죽음을 뚫고 상승하고 있었다. (56)
분신자살을 기도했던 서울대생이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본 이 환영은 삶에 대한 긍정이 너무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을 두고.) (080816)
---
1.이창동은 서사에 충실하다. 그래서, 소설 상의 새로운 시험은 찾아보기 힘들다. 플래시백 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인물 군상을 보여주는 것은 좋으나 좀 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2. 우리의 분단 현실과 ‘실패한 아버지, 혹은 부재하는 아버지’라는 우리 소설의 전형적인 단면이 이창동의 작품에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구체적인 예는 ‘전리, 친기, 소지’ 등이다.
'한국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훈 - 현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4 (0) | 2021.10.30 |
---|---|
이창동 - 녹천에는 똥이 많다. 문학과지성사. 1992 (0) | 2021.08.02 |
구효서 - 낯선 여름. 중앙일보사. 1994 (0) | 2021.07.15 |
이문열. [변경] 1-12. 문학과지성사 (0) | 2020.12.02 |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2016] (0) | 2018.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