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언제, 어디서 봤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되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왜 기억이 안 나는지.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방법은 생각이 났다. 가계부를 보면 적어도 언제 보았는지는 알 수 있을 거라는 것.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어서 또 잠시 망설였다. 기억에 너무 집착한다면 강박 증상일 듯해서, 그리고 기억이 떠오르지도 않아, 가계부를 살펴 보니 날짜와 장소가 모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망각되었던 기억도 다 떠오르고 왜 망각되었는지도 알 듯하다. 그 날 탁구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대리 운전비를 아끼기 위해 술도 깰 겸 신당동에 있는 탁구장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서 영화를 보고, 다시 차를 세워 둔 - 낯익지 않은 동네라 차를 찾는데도 애를 좀 먹었다 - 곳으로 와서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왔다. 망각이 일어난 것은 그 날 술자리에서 좀 안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무의식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사설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이 사설이 사설만이 아닌 것이, 그 때, 술을 좀 마시긴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좀 어리둥절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느낌도 좋은 쪽보다는 의아한 면이 강했다고나 할까? 시간이 2주 가까이 지나, 인상이 다소 흐려진 것이 있긴 하지만, 오늘 점심 때인가 텔레비전 뉴스 아랫편에 자막으로 나온 것이 이 영화와 관련된 나의 생각의 한 부분과 잘 매치된다. (영화 덕혜 옹주 - 역사 왜곡. 덕혜 옹주 독립 운동 안 해.)
이전에 본 허진호 감독의 영화 두 편,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에 대한 나의 인상은 좋은 쪽이다. 특히 [봄날은 간다]는 친했던 과후배가 조감독으로 참여해서 더욱 나에게는 의미가 깊은 영화였다. 사랑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하는 사랑을 다룬 이 두 편의 영화는 '멜로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문 섬세한 감성을 구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기억이 너무 흐리다).
[프로필을 보니 [봄날은 간다]가 2001년도 영화다. 15년 전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허진호 감독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위의 두 작품만큼 인상 깊은 영화는 없었다.]
권비녕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한 이 작품은 흥행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미 5백만을 넘긴 상태니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흑자를 기록했을 듯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은 "덕혜옹주"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기 때문일 터인데, 이 영화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덕혜"보다는, 그랬으면 하는 상으로서의 "덕혜," 다시 말해 '옹주로서의 정도?를 지키려다 정신이상에 이르고만 인물'로서의 "덕혜"에 치중하고 있다. 이 부분이 나로하여금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렵게 만든 부분이다.
역사 왜곡의 문제는 덕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고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나라를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다면 망명을 가던지, 그게 아니라면 외세와 맞서 싸우다가 죽는 모습이 바람직한 군주의 모습일 터인데(물론 이런 식의 이야기는 당대 상황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이고 도식화이겠지만) 국가를 내주고도 군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고종의 모습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를 하고, 이 영화나 소설 - 소설을 읽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또한 영화와 비슷하리라는 가정 아래 말해 본다 - 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허진호 감독이 역사적 사실과 팬터지를 교묘하게 섞은 이런 영화를 만든 까닭은 또 무엇일까? 복고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 영화의 관념에 호응하는 대중의 심리는 또 무엇일까?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서구의 기사 이야기인 로맨스(여기서는 단순히 현대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장르. 기사들의 모험과 사랑의 이야기를 가리킨다)의 전통에 나오는 '궁정식 사랑'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아서 왕의 아내인 귀느비어와, 기사 란슬롯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이 '궁정식 사랑'에서는 기사가 고귀한 신분의 여성을 정신적으로 흠모하고 온갖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김장한과 덕혜 옹주는 그러한 오래된 전통의 변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프로이트는 끝끝내 이것을 물고 늘어졌다)의 변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확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 본다면, 남자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감정,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무한히 받는 딸 아이의 감정, 이런 것이 이 영화에 재현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허진호는 이 영화에 인간의 그런 원초적인 감정들을 흥미롭게 구현해 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역사적인 덕혜와 영화 속 덕혜와의 큰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영화는 영화니까, 영화로만 봐주세요, 라고 발뺌만 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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