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으로/코플스턴서양철학사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1 Greece and Rome. Part 1. Pre-Socratic Philosophy C6 - C11 코플스턴 [서양철학사] 그리스 로마 철학사.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6장 - 11장

by 길철현 2022. 6. 11.

VI. The One of Parmenides and Melissus

(거스리) Guthrie

The significance of Parmenides is that he started the Greeks on the path of abstract thought, set the mind working without reference to external facts, and exalted its results above those of sense-perception. In this the Greeks were apt pupils, so much so that according to some their genius for abstract thought and for neglecting the world of external fact set European science on the wrong track for a thousand years or so. Whether for good or evil, here we see the process at its beginning. (49)

 

(러셀 -  서양철학사)

* "The thing that can be thought and that for the sake of which the thought exists is the same; for you cannot find thought without something that is, as to which it is uttered." (Parmenides)

 

The essence of this argument is: When you think, you think of something; when you use a name, it must be the name of something. Therefore both thought and language require objects outside themselves. And since you can think of a thing or speak of it at one time as well as at another, whatever can be thought of or spoken of must exist at all times. Consequently there can be no change, since change consists in things coming into being or ceasing to be.

 

* This is the first example in philosophy of an argument from thought and language to the world at large. It cannot of course be Parmenides assumes that words have a constant meaning; this is really the basis of his argument, which he supposes unquestionable. But although the dictionary or the encyclopaedia gives what may be called the official and socially sanctioned meaning of a word, not two people who use the same word have just the same thought in their minds.

George Washington himself could use his name and the word "I" as synonyms. He could perceive his own thoughts and the movements of his body, and could therefore use his name with a fuller meaning than was possible for any one else. His friends, when in his presence, could perceive the movements of his body, and could divine his thoughts; to them, the name "George Washington" still denoted something concrete in their own experience. After his death they had to substitute memories for perceptions, which involved a change in the mental processes taking place when they used his name. For us, who never knew him, the mental processes are again different. We may think of his picture, and say to ourselves "yes, that man." We may think "the firs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f we are very ignorant, he may be to us merely "The man who was called 'George Washington.'" Whatever the name suggests to us, it must be not the man himself, since we never knew him, but something now present to sense or memory or thought. This shows the fallacy of the argument of Parmenides. (51) accepted as valid, but it is worth while to see what element of truth it contains. (49) 

[사람마다 언어에 대한 생각이 다름.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오류임]

[사람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소통의 문제. 그들이 언어를 사용할 때 지니는 기의에 있어서의 차이. 

파르메니데스의 중요성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천착했다는 것인가?]

 

(78) 크세노파네스 - 엘레아학파. 부동의 일자. 일원론자이지만 일신론자는 아닐 가능성

(79) 파르메니데스 - 일자는 존재하며, 전화(Becoming), 변화는 환상

Being, the One, is, and that Becoming, change is illusion. 48

80) 감각 - 현상의 길 거부

81) 일원적 유물론을 수립하려는 이유는 일원적 유물론에서는 변화와 운동이 환상적인 것으로 추방되기 때문. 단지 이성만이 실재를 이해할 수 있으나 이성이 이해하는 실재는 물질적이다. 이것은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 그것은 있다. 

- 세계의 본질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이설(理說)

"그것", 즉 실재, 존재는 그것의 본성이 어떠하든,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존재는 말해질 수 있고, 내 사유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無)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는 말이나 사유의 대상일 수 없다. 왜냐 하면 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며, 무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단순히 존재할 수 있기만 할 뿐이라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결코 생성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무에서 나와야만 할 것인데, 무에서 나오는 것은 무이지 어떤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 실재인 "그것"은 처음에는 불가능했다가, 즉 무였다가 그 다음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있다."

왜 우리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있다"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기거나 또는 비존재에서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생긴다면 진정한 생김, 생성이란 없다. 왜냐 하면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비존재로부터 생긴다면 비존재는,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 이미 어떤 것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존재, "그것"은 그러므로 존재로부터 생기지 않고 비존재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존재에 통용되므로 어떤 것도 결코 전화(轉化)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만약 어떤 것이 전화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어려움이 언제나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로부터 나오는가 또는 비존재로부터 나오는가? 만약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비존재로부터 나온다면 당신은 모순에 빠지는데, 왜냐 하면 비존재는 무(無)이고 존재의 연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 즉 전화와 운동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있다." "즉, 우리가 그것은 있다고 말하는 한 가지 길만이 남아 있다. 이 길에는 존재하는 것은 완전하고 부동이며 무한하기 때문에, 창조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다는 증거들이 매우 많이 있다."

 

- the doctrine of Parmenides on the nature of the world

His first great assertion is that "It is." "It," i. e. Reality, Being, of whatever nature it may be, is exists, and cannot not be. It is, and it is impossible for it not to be. Being can be spoken of and it can be the object of my thought. But that which I can think about and speak of can be, "for it is the same thing that can be thought and that can be." But if "It" can be, then it is. Why? Because if it could be and yet were not, then it would be nothing. Now, nothing cannot be the object of speech or thought, for to speak about nothing is not to speak, and to think about nothing is the same as not thinking at all. Besides, if it merely could be, then, paradoxically, it could never come to be, for it would have to come out of nothing, and out of nothing comes nothing and not something. Being, then, Reality, "It" was not first possible, i. e. nothing, and then existent: it was always existent--more accurately, "It is." 

Why do we say "more accurately, It is?" For this reason: If something comes into being, it must arise either out of being or out of not-being. If it arises out of being, then there is no real arising, no coming-to-be; for if it comes out of being, it already is. If, however, it arises out of not-being, then not-being must be already something, in order for being to be able to arise out of it. But this is a contradiction. Being therefore, "It" arises neither out of being nor out of not-being: It never came into being, but simply is. And as this must apply to all being, nothing ever becomes. For if anything ever becomes, however trifling, the same difficulty always recurs: does it come out of being or out of not-being. If the former, then it already is; if the latter, then you fall into a contradiction, since not-being is nothing and cannot be the source of being. Change, therefore, becoming and movement are impossible. Accordingly "It is." "One path only is left for us to speak of, namely, that It is. In this path are very many tokens that what is, is uncreated and undestructible, for it is complete, immovable and without end."

 

[심플리키오스]

280) ---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 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 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또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과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있고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색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든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로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게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서 균일하게 있기에. 

 

82) 일자는 유한하다.

83)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므로 시간적으로 무한하지만, 공간적으로는 유한하다. 더구나 그것은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실재적이다 그러므로 형체가 구형이고, "그것은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에서보다 더 크거나 더 작을 수 없기 때문에, 중심으로부터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놓여있다."

- 버넷: 모든 유물론이 그의 실재관에 의존한다.

- 이 세계는 절대적 실재의 표현인데, 절대적 실재는 사고, 즉 개념에 있다. (관념론자로서의 측면)

[사고되는 존재로서의 일자/ 구체(Sphere) - 현실에 실존하는 감각 사고 대상으로서의 존재/ 변화하고 소멸하는]

It = Reality. Being

[언어 사용의 혼돈. 무엇이 존재한다에서 존재가 존재한다]

 

[Ohr] 인터넷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

 

1세대 - 탈레스 : 변화하는 것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루는 원천. mythos - logos

 

2세대 - 질문: 변화의 문제(헤라클레이토스 변화와 대립을 통해 일자 존재, 파르메니데스  변화의 불가능성. 추론을 사용. 이원론의 기반 /(보충- 코플스턴은 유물론자로 봄. 버넷 등도)

 

파르메니데스 - 없음의 없음. 그래서 변화는 불가능. 

 

[Parmenides' One - Geoffrey Kempner]

the One은 감각 현상의 세계가 아니라 사고의 세계이다. 그래서 잘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나름대로 치밀한 논증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 (현상의 세계를 환영으로 치부하고 깡그리 무시하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파르메니데스가 좀 더 뚜렷해지지 않을까 함. 

 

1. Take anything you like (call it x).

2. Either x is, or x is not.

3. If x is not, then x cannot be. The very idea of x is ‘unthinkable’.

4. By contraposition, if x can be then it is.

5. If ‘x is’ follows from ‘x is possible’ then x is necessary.

6. All that is, is necessary and cannot not-be.

 

(YOUTUbe)

-무에 대해서는 무라는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음. 그 내용이 없음

[나의 견해 - (연역법/ 관찰 - 귀납법) 연역 추론이 이상한 대로 흐른 예]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일자(the One)는 현상(감각) 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추론)에 의해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존재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지만, 그가 논증을 통해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중요성으로 인해 이후 철학자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지금 이 시점에서 더 이상 깊이 파악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이후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VII. The Dialectic of Zeno

 

58) the line and time are continuous and not discrete

60) monists rather than pantheists. (범신론자라기보다는 일원론자) 자연철학자들

 

 

89) 피타고라스 학파 단위설 - 반박. 어불성설임을 보임

 

* 멜리소스(Melissos)

759) 멜리소스의 저술이 원자론과 밀접한 연관

 

VIII. Empedocles of Akragas

 

62) Love and Hate, or Harmony and Discord

64) thought 와 perception의 문제

 

 

97) 새로운 철학을 창시한다기보다는 그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결합하고 조화시키려고 노력

97) "또 전체 속에는 빈 무(naught)와 너무 꽉 찬 무도 있다." 그래서 "전체 속에는 빈 무가 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는 어딘가에서 그것을 증가시키게 되는가?" (무슨 말?) 정확한 번역을 보니까 어려운 말이 아니다. 

And in the All there is naught empty and naught too full. In the All there is naught empty. Whence, then, could aught come to increase it? 62

 

 

[전체에는 빈 것도 없고, 넘치는 것도 없다네. 

[전체에는 빈것이 없거늘. 그러니 어디서부터 어떤 것이 그것에 들어갈 수 있을까? 348] 이것이 정확한 번역인 듯. 

- 실체란 인간이 이러한 사물들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98) 엠페도클레스 - 파르메니데스의 유물론적 입장을 명백한 변화의 사실과 조화시키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 즉 궁극적인 물질적 입자들의 다양성을 가정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의 체계와 감관의 증거 사이의 중재자. 

- 4원소설

- 사랑과 미움/ 조화와 대립. 주기적 반복

101) (존재와 변화로 가득한 현상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 노력) 그러나 그는 자연의 물질적 순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신화적인 힘인 사랑과 미움에 의존해버렸다. 세계화 과정의 원초적 원인으로서 마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아낙사고라스에게 맡겨졌다. 

 

408) 엠페도클레스는 [노새가 불임하는 이유가] 둘[암말과 숫나귀]의 생식기관이 말랑말랑한데도 그것에서 나온 씨들의 혼합물이 단단해지는 탓이라고 말한다. 우묵한 것이 단단한 것과 서로 꼭 들어맞으면, 그런 일에 의해 그와 같은 말랑말랑한 것들로부터 단단한 것이 나온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주석과 섞인 청동처럼. 

413) 인간에게서 심장 주위의 피는 생각이기 때문이네.

 

766) 엠페도클레스의 혼합 이론은 희랍 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진보 곧 질적 사고에서 양적 사고로의 전환으로 평가된다. 

 

* 필롤라오스와 기원전 5세기 피타고라스주의자들

441) 우주에 있어서 본성은 한정되지 않은 것들과 한정하는 것들로 짜맞추어졌다.

452) 필롤라오스를 포함하여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하는 어떤 이들은, 달은 우리 쪽에 있는 지구에서처럼 동식물들이 서식하므로 달은 지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것도 더 크고 더 훌륭한 동식물들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 위에 있는 동물들은 전혀 배설물을 배출하지 않으며 힘이 [지구에 있는 동물들보다] 15배나 되고 하루도 그만큼이나 길기 때문이라고 한다. 

464) 신들은 우리의 보호자들이며 우리 인간들은 신들의 소유물들 가운데 하나. (파이돈)

486) 그들은 지배자가 없는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다.

 

780) 그는 한정을 가짐 혹은 수를 가짐을 우리가 앎을 갖는 데 필요조건으로 보고 있는 것.

784) 자연철학사의 주류 속에 편입될 수 있는 철학자. 

 

CIX. The Advance of Anaxagoras (아낙사고라스)

 

 

103)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 존재는 생성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불변한다 (물질불변론)

- 아리스토텔레스 : 실현과 잠재 (변화를 설명하려는 노력)

[maintain the Parmenidean doctrine. realist attitude towards change. Aristotle - potency and act 68]

106) 정신 - Nous ; 무한하고 자율적이며,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채, 홀로 그 자체로 있다.

모든 사물들 중에서 가장 미세한 것이며 가장 순수한 것

그것은 만물에 관하여 그리고 최대의 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

108) 그가 정신적이고 지적인 원리와 그 원리가 형성하고 운동하게 하는 사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충분하게 이해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그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원리를 처음으로 도입

 

500) 생성소멸 -- 섞이고 분리되는 것

509) 무한한 시간 동안 모든 것들이 함께 있었으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지성이 운동을 만들어 넣어주자 분리되었다.

519) 해는 그 크기가 펠로폰네소스를 능가한다. 달은 자신의 고유한 빛을 갖고 있지 않고 해로부터 받는다. 별들의 회전은 땅[지구] 아래쪽으로 일어난다.

 

794) 아낙사고라스가 지성을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궁극적인 주체로 놓고 그것이 사물들과 전혀 섞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는 운동하는 것으로부터 운동의 원인을 명확히 구별한 최초의 철학자로 불릴 만하다. 

796)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 아낙사고라스가 우주의 근원적인 운동을 출발시키기 위해서 지성을 끌어들였지만, 그것을 더 이상 우주의 지성적인 창조자 또는 조정자로 사용하지 않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나머지를 설명했다고 비판

 

CX. The Atomists

73) "what is not" is just as much real as "what is."

74) to him[Leucippus] the eternal motion and the continuation of motion required no explanation 

 

110) Leucippus 레우키포스

111) 원자론의 철학은 --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을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것. 

113) 최초의 부동의 운동자 First Unmoved Mover

114) 이 세계를 기계적 유물론으로 완전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근대에 물리학의 영향을 받아 훨씬 더 철저한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그 훌륭한 가설이 그리스 철학의 종언은 결코 아니었다. 그 이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세계의 풍부성이 그 모든 영역에서 원자들의 기계적 상호 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CXI. Pre-Socratic Philosophy

76) some unity underlying diversity

79) cosmological interest

 

115) 그리스 철학은 일과 다의 문제를 맴돈다는 말을 자주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 철학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단일성의 개념을 발견한다. 사물들은 다른 것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어떤 공동의 기반, 어떤 궁극적인 원리, 즉 다양성의 배후에 도사린 어떤 단일성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116) 니체 - 그리스 철학은 앞뒤가 맞지 않는 공상, 즉 물이 만물의 근원이며 어머니의 자궁이다는 명제로 시작하는 것 같다. 그곳에 멈추어서 심각해질 필요가 정말로 있는가? 그렇다. 그것도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그 명제는 사물의 기원에 관한 그 무엇을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비유와 꾸밈(우화 fable)없이 그러하기(사물의 기원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속에는, 비록 과도적 상태에서이기는 하지만, 만물은 일이라는 생각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언급한 이유는 탈레스를 여전히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게 한다. 그러나 그 두 번째 이유는 그를 이 교제로부터 끌어내려 자연학자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탈레스는 세 번째 이유의 덕택으로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가 된다. 

(Greek philosophy seems to begin with a preposterous fancy, with the proposition that water is the origin and mother-womb of all things. Is it really necessary to stop there and become serious? Yes, and for thress reasons: Firstly, because the proposition does enunciate something about the origin of things; secondly, because it does so without figure and fable; thirdly and lastly, because in it is contained, although only in the chrysalis state, the idea--Everything is one. The first-mentioned reason leaves Thales still in the company of religious and superstitious people; the second, however, take him out of this company and shows him to us as a natural philosopher; but by virtue of the third, Thales becomes the first Greek philosopher. 76)

117)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외부 세계, 객관, 비아(非我)를 중심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인간, 주관, 자아가 고려에서 배제되지는 않지만, 비아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다. 

118) 그들은 우주의 궁극적인 "원료"가 모종의 물질임을 발견했다. / 우주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