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라는 것이 전형에 따른 상대성이 워낙 강한 종목이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는 드라이브 채는 힘이 좀 부족한 편이라 수비수와의 게임에 약한 편이다. 일례로 2016년도 내가 속한 동우회 자체 최강전에서는 3부로 출전하여 김태신, 허남규 등의 아마추어 최강자들을 꺾고 당당히 우승(이 날은 나의 날이었는지 복식마저 우승을 했다)을 하여 회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었지만, 바로 1주일 뒤에 열린 오픈 대회에서는 4부로 출전하여 수비수에게 지는 바람에 예선 탈락을 해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위의 예가 잘 보여주듯 수비수나 수비수가 아니더라도 롱과의 시합에서는 아픈 기억들이 태반이라 돌이켜 생각하는 것도 싫은데, 유독 내 입이 귀에 걸리게 하는 시합이 하나 있어서 육 개월 가량의 시간이 지났지만 한 번 적어본다(상대 선수에겐 좀 미안하다).
그 전날(2021년 12월 25일) [서아탁구클럽] 리그전에 참가하였다가 3회전에서 장지영(2부)에게 2대 3으로 패한 것이 아쉬워서 [삼성현탁구장] 리그전에 다시 문을 두드렸다. 예선전에서는 우리 조에 강자가 없어서 다소 수월하게 5전 전승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 1회전은 부전승으로 올라갔고, 2회전에서는 선수 출신으로 0부를 치는 친구와 시합을 했다. 예전에 한 번 이기긴 했지만 고수라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세트를 내주는 바람에 더욱 그랬는데, 2세트와 3세트를 연거푸 따내니까 이 친구가 기권을 했다. 의외긴 했으나 체력도 아낄 수 있고 해서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다음 16강 상대는 나와 같은 부수로 뒷면이 롱인 중펜 수비수였다. 이 친구도 전날 [서아탁구클럽] 리그전에 참가해서 시합은 하지 않았지만 치는 것은 얼핏 보았다. 몸을 빙글 돌리면서 디펜스 하는 걸 보고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같은 동호회 후배인 황성욱(2부)은 예선전에서, 그리고 1부의 최강자인 조창래 관장은 32강에서 이 친구에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공히 나에게 서브가 커트와 오시성이 있어서 까다로우니 일단 리시브부터 잘해야 한다고 일러주었지만 막상 시합에 들어가 보니 감당이 잘 안 되었다(내가 리시브가 좋은 것도 아니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그냥 물러날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내 서브에서는 긴 서브에 이은 3구 드라이브 공격과 스매싱으로 계속 추격해 갔지만 첫 세트를 9대 11로 내주고 말았다(지금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고 [탁구 일지]에 적어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본다). 그다음 세트에서도 나는 여전히 서브를 탔고, 상대 선수는 내 공격을 점점 더 잘 막아내 내 공격 범실이 더 잦아지는 바람에 7점밖에 내지 못했다. 들어가기 전부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던 시합은 막상 부딪혀 보니 패배가 확실한 듯보였다. 뒤풀이를 함께 하기로 한 황성욱과 조창래 관장 등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먼저 탁구장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3세트에서도 게임의 패턴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고, 6대 10으로 나는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툭 밀기만 해도 나락으로 추락할 판국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리시브를 까다롭게 할 수는 없어도 상대의 공격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니 일단은 넘기는데 집중을 하자, 무리하게 득점을 하려 말고 드라이브를 걸고 그 다음 공은 커트를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완전한 찬스 볼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다른 건 다 잊고 한 점에만 초점을 맞추자. 생각과 현실은 항상 편차가 있어서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기란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갑자기 뜀박질을 하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까울 것인데 이 날은 그 불가능이 가능이 되었다. 한 점 한 점 계획대로 밀고 나가다 보니 어느새 듀스가 되었고, 듀스에서 시소게임을 하다가 마침내 16대 14로 한 세트를 따냈다.
정말 힘겹게 한 세트를 따냈고, 그다음 세트에서도 내 작전이 먹혀 들어가 11대 4로 쉽게 한 세트를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승기가 내쪽으로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 상대도 막판까지 몰리자 더욱 강하게 나왔다. 2점 정도 차이로 계속 쫓아가는 입장이었는데 또 다시 드라이브 범실로 6대 10으로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상대의 서브 2개를 받아넘긴 다음 드라이브와 커트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상대의 범실을 유도해 2점을 따냈고, 내 서브에서는 포핸드 너클 긴 서브를 상대방 백핸드로 넣은 다음 드라이브와 커트를 반복하다가 공이 높이 떠올랐을 때 스매싱을 해서 또 2점을 연거푸 따내 듀스를 만들었다. 그러자 상대는 기세가 다소 꺾였고, 나는 듀스 상황에서 또 연속으로 2점을 따내 12대 10으로 정말 믿기지 않는 승리를 연출해 냈다.
장장 1시간이 넘는 혈투에서 귀중한 승리를 얻어냈으니 내 사기는 그야말로 천장을 뚫고 나갈 정도였다. 그래서 8강전(상대는 아마도 기다리다 지쳐버렸을 것)과 4강전은 둘 다 3대 0으로 쉽게 건넜다. 큰 산을 하나 정말 힘겹게 넘었더니 그 다음은 탄탄대로인 격이었다. 공동우승으로 테너지를 한 장 득템했다. 하지만 이날 시합은 내 몸에 엄청난 피로를 남겼고, 그 다음 날 나는 영화관에서 [스파이더 맨: 노 웨이 홈]을 보다가 그만 혼곤한 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탁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탁구 이야기 - 제5회 탁신 회장배 최강전 후기 1(20220618) (0) | 2022.07.07 |
---|---|
탁구에 대한 맹세 (1) | 2022.07.01 |
2022년 탁구 이야기 -- 불가능의 불가능: YG 서브 연습 중에 (0) | 2022.06.20 |
제5회 탁신 회장배 최강전을 맞이하여(20220618) (0) | 2022.06.18 |
추억의 탁구장 (0) | 2022.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