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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달팽이 - 박형준

by 길철현 2016. 8. 30.

 

 

달팽이

                 박형준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나는 이제 소멸에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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