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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제주 기행 (5) 90년 8월 14일 - 20일. 성장이냐, 방탕이냐? [넷째 날 - 8월 17일]

by 길철현 2016. 9. 13.

 

비교적 일찍 일어난 나는 -전날도 나는 욕망에 몸부림쳤다- 여관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먼저 한라산을 오른 뒤에, 성산포에 가서 해돋이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제주도의 버스 노선을 해안을 끼고 도는 해안도로와, 한라산을 관통하는 관통도로로 크게 나뉘어 지는데, 이 도로를 이용하면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갈까 하는데, 곧 출발하는 차가 있어서 그냥 떠났다.

 

약 7시간 거린다는 등산 코스. 높이에 비하면 오르기가 굉장히 수월한 모양이었다. 한라산에서는 취사나 야영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산과 다른 점이다.

 

'영실'에서 내린 나는 허기진 배를 안고 부지런히 걸어 올랐다. 비싸긴 했지만 딴 곳에서 먹을 걸 구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천 원이나 하는 김밥을 사먹고 크리미 두 병을 사가지고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단체로 관광 온 사람들은 어디서나 득실거렸다. 대여섯 살밖에 되어보이지 않는 꼬마도 있었고, 여고생도 눈에 띄이는가 하면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였다. 등산로는 꼬불꼬불하고 기울기도 가팔라서 꽤 힘이 들었으나 약 두 시간 정도 그렇게 오르고 나자 그 다음부터는 평지였다. 4차선 정도 될 듯한 넓은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엣, 백록담을 싸고 있는 절벽을 보았는데, 한라산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절경이라면 바로 이 백록담을 둘러싼 절벽이다. (덧붙임. 2014년도에 다시 제주도를 찾았을 때, 이 '영실' 코스를 다시 올랐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백록담의 남벽을 따라 난 등산로를 걸으며 창날처럼 날카로운 바위들이 솟아 있는 남벽이 절경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남벽에 대한 기억은 윗세오름에서 보이는 부분만 기억이 있고, 그 너머에 있는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아주 간략하지만 그 당시에도 이 남벽을 경이롭게 보았다는 것이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곧바로 올라가면 얼마 안 될 거리인데, 자연보호 측면에서인지 그 쪽을 `봉쇄해 높아, 빙빙 돌아서 백록담에 올라가야 했는데, 바로 거기가 난코스였다. 이 때까지 잘 올라오던 사람들도 여기서는 낑낑대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남았느냐고 연방 물어댔다. 나의 무릎도 팍팍한 게 좀 쉬었다 올라가고 싶었다. 캐쥬얼 화이긴 하지만 영에이지가 등산에 편할 리도 없었다. 얼마를 그렇게 낑낑 대었을까?

 

드디어 정상에 다달았지만, 기쁨보다는 실망감이 먼저 나를 휩쌌다. 가뭄 때문에 백록담의 물은 거의 다 말라버려 조그만 물웅덩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정산 쪽은 자연 보호 측면에서 출입을 금지 시켜놓고 있었다. (백록담을 둘러싼 화구 부분에 도달했기 때문에 앞에서 정상에 도달했다고 했지만, 화구 중에서 가장 높은 부분 즉 1950미터 지점은 올라갈 수 없도록 해놓았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반대 방향, 즉 성판악 휴게소 쪽으로 잡았다. 이 하산길이 나에겐 퍽 인상 깊은, 그리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화구를 벗어나 하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나보다 약간 어린 듯한, 낑낑대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물을 요청했으나, 나는 남아 있던 크리미를 정상에서 해치워 버렸기 때문에 이들에게 줄 게 없었다. (사실 있었다고 해야 이렇게 많은 사람에겐 도움도 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들이 물 없이 아직 몇 킬로 - 우물은 정상을 지나 몇 킬로 걸어가야 있었다 - 를 가야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새디스트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내가 가야할 곳이 내리막길이긴 하지만, 적어도 서너 시간 동안 나도 물 없이 지내야 한다는 공포감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 뒤 나는 젊은 남녀를 만났고(올라오는), 그 다음부터는 줄곳 혼자였다. 한라산에는 야영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후 늦게 올라오는 사람이 없었고, 성판악 쪽으로 하산하는 사람도 없었다.

 

안내판은 거의 500미터마다 꽂혀 있었지만, 울창한 수풀 속으로 난 산길을 혼자 걷는다는 생각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길을 잃어 버린다면, 발을 삔다면, 뱀에게 물리기라도 한다면.

 

정신을 딴 데로 팔아선 안 돼, 혼자다, 혼자, 아무도 없는 곳. 나를 해할 사람도 없고,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다. 금산에서처럼, 그러나 그 때는 마을이 보엿고, 아니 적어도 옆에 집이 있었다. 거기 누군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아무도 없다. 철저히 혼자다. 길을 잃어버린다면.

 

한 반쯤 내려왔을까? 나는 대피소라고 쓰인 안내판을 따라, 마실 거라도 살까 해서 가보았는데, 거긴 정말 문자그대로의 대피소였다. 거기도 아무도 없는 빈집이었다. (덧붙임 : 2014년에 이어 2015년에도 제주도를 찾았는데, 그 때 이 성판악 코스로 올라갔다. 제부와 나, 둘째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출발을 했는데,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한 시인가 이전에 통과하지 못하면 정상에 못 올라간다 - 성판악에서의 출발 자체가 너무 늦었다 - 고 해서 거의 뛰다시피하며 나 혼자만이 진달래밭 대피소에 시간에 맞춰 도달할 수 있었다. 정상을 꼭 다시 보아야 할 이유는 없었으나 - 예전과는 달리 2014년에 '영실' 코스로는 정상에 올라갈 수 없어서 그 다음 날 관음사 코스로 올라갔다 - 당시 약간의 무력증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진달래밭 대피소를 통과하는 것을 하나의 테스트로 생각을 했다. 그 때 너무 무리를 해서인지 몸 군데군데 발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꼭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때 들렀던 대피소가 진달래밭 대피소인 듯하다.)

 

혼자라는 것, 주위엔 아무도 없다. 나를 해할 사람도, 도울 사람도.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길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자지 끝이 약간씩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병에 걸린 것일까?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쾌감도 주지 못하고 두려움만 심어 놓았다. 그 미소. 아람드리 나무들, 끝없는 나무의 집합소, 끊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도 이어지는 길, 길.

 

멀리서 차 지나는 소리, 사람 목소리가 들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것이 안도였을까? 낯설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호기심. 약 30분쯤 기다리자 서귀포로 가는 버스가 왔다.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그러나, 구불구불, 뱀처럼,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도로를, 위험하게, 잘 달려나갔다.

 

시외버스를 내려, 천지연 폭포라고 쓰인 시내버스를 탔다. 내리는 곳을 사람들에게 묻지 않아 몇 정거장 전에 내린 꼴이 되어 버렸다. 요번에는 예측이 빨랐다. 포구에 매어놓은 배 위에서 몇몇 선원들이 술자리를 벌여놓고 있었다. 바람이 꽤 세게 불어서 배가 흔들거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지나가는 꼬마를 불러놓고, "꼬마야, 천지연 폭포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니?"하고 묻자, 꼬마는 아주 무뚝뚝하게 "이리루 가세요" 대답했다. 왜 일까? 왜 그는 화를 내었을까?

 

혼자 다니는 사람은 없다. 나를 빼놓고는. 천지연 폭포에서 나는 카페리 호를 타고 올 때 보았던 사람들을 또 보았다.

 

정확히 표현해 낼 순 없지만 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신기했다. 물에 이어서 또 물이, 점점 짜르게, 혹은 솟구치는 느낌을 주며, (왜) 물에 이어서 물이, 연속적으로, 끊기지 않고, 세차게, 저 아래서는 아무것도 맥을 칠 수 없으리니.

 

제주도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성산의 일출을 보기 위해 성산행 버스를 타고 성산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의 지명은 성산이 아니었지만, 성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