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고
재작년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당시 코로나 상황과 맞물려 이 책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 놓인 한 소도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끔찍함과 참혹함 속에서 어떻게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어야 하는지를 모색하고, 아니 현실이 그렇게 참혹하지는 않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던가? 이번에 다시 한 번 더 정신적 위기가 찾아와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는 가운데 거의 하룻밤에 이 책을 다 읽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눈멈에 대한 에세이](Ensaio sobre a cegueira)이고 영어 제목은 [눈멈](Blindness)이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이 멀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단순한(비현실적인) 착상에서 저자는 출발하지만, 이후의 세부 묘사는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아주 생생하다(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부만 본 듯했다). 인간의 모든 시스템이 무너지고 이리저리 먹을 것을 찾아 배회하는, 그래서 동물보다도 더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저자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안과 의사의 부인만은 눈이 멀지 않은 것으로 상정했다. 인간의 근원적 동물성과 함께 가장 열악하고 참혹한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등을 정말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것은 인간 모두에게 공히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굳이 개개인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듯하다.
정영목의 번역이 뛰어나긴 하지만, 포르투갈 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본을 중역했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발췌]
12) 첫 번째 남자 - 아무것도 안 보여요, 마치 안개 속이나 우유로 가득한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24) 어쩌다 나한테 이런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나일까.
39) 의사 - 그도 곧 눈이 멀 운명이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의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은 잠시 후, 의사가 책을 모아 책꽂이로 가지고 갔을 때 일어났다. 처음에 의사는 자기 손이 안 보인다고 느꼈다. 이어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았다.
168) 의사 부인 -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
175)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영원한 것은 없다
277) 노인 -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두목]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334) 딱딱한 빵 한 조각의 냄새는, 숭고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삶 자체의 본질과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김용재 - 주제 사라마구의 따뜻한 시선: 실명에 대한 연습
468)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우상과 권위에 대한 개인의 외로운 싸움이나 윤리관이 파괴된 사회 체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를 주제로 하고 있다.
470)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그 소유를 위해 우리의 인간성조차 쉽게 말살하는 장님이기에 눈을 비벼 눈곱을 뗀 후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474) '볼 수 없다'는 기묘한 설정은 세상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수가 뿌려져 있기에 이를 보지도, 냄새 맡지도 못하는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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