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구의 대명 시장 근처 새마을금고에 들렀다가 시간이 좀 남아 대명 시장을 비롯하여 그 주변을 거닐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날 집과도 가까워 곳곳에 오래된 기억들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골목길을 걷다가 '탁구장'이라고 적힌 입간판을 발견하고는 나는 깜짝 놀랐다. 이곳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에 당시 같은 반이었던 방효준, 이종찬과 자주 탁구를 치러 가던 곳이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가가보니 탁구장 영업을 하고 있지는 않았고, 내부도 가정집으로 개조한 듯했다. 그렇다면 입간판은 왜 있는가? 의아해하다가 다른 차들이 주차하는 것을 막는 용도로 사용하는 모양이라고 추론했다. 그럼에도 페인트 색깔이 많이 바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탁구장 이름은 까마득하기만 한데 방효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기억력이 비상한 그가 '신진 탁구장'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방과 후 여가 생활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는데(전자오락실과 당구장은 출입금지였다) 그나마 탁구장 출입은 자유로웠다. 그 때는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고, 또 탁구는 운동이라기보다는 놀이라는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탁구장 시설은 대체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사진으로 딱 봐도 알 수 있듯 1층에 있던 이 탁구장 역시도 시멘트 바닥에다가 공간 또한 정말 협소했지만 탁구장에 비치된 싸구려 라켓을 든 우리들이 즐기기엔 큰 불편함은 없었다.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탁구대가 세 댄가 네 대뿐이었던 이 탁구장에서 때로는 기다리다가 쳐야 했고, 또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때에는 다른 탁구장으로 가기도 했다.
우리 세 명이 어떻게 친하게 되었는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탁구가 우리를 이어주는 굵은 끈 중 하나였다는 건 분명하다. 방효준과 나는 실력이 비슷했고 이종찬은 우리보다 실력이 좀 떨어져 5점을 접어주고 시합을 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21점 게임이었고, 서브도 2개가 아니라 5개씩 넣었으며, 셀룰로이드로 된 공도 지금보다 지름이 2밀리미터 작은 38밀리미터였다. 이종찬은 심판을 볼 때 카운트를 제대로 못해 우리에게 타박을 받기도 했으며, 우리와 탁구를 치러 가느라고 분단별로 이뤄지는 청소를 빼먹은 적이 많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도망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나도 한 번은 다른 애에게 어거지로 맡겨놓고는 탁구를 치러 갔는데, 이 애가 청소를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려 다음날 벌을 받아야 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시험 기간에 오히려 거의 매일 탁구장을 찾았던 일이다. 나는 시험 때면 밤을 새워 공부한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밤을 새우려면 낮잠을 자두어야 하고, 낮잠을 자려면 몸을 피곤하게 해야 하므로, 시험 전날은 물론 시험 기간 내내 학교에서 곧바로 탁구장으로 가 탁구를 많이 쳐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논리에 따랐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었는지는 여기서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친구들 또한 나의 엉터리 논리에 동조한 것을 보면 그만큼 탁구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공부로부터 도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60을 바라보는 현재에도 탁구는 여전히 나의 최애 스포츠이고, 열정은 줄어드는 체력에 반비례하여 오히려 강해지는 느낌이다(물론 중간중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탁구 라켓을 처음 잡고 4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릴 적에 탁구를 치던 동네 탁구장들은 모두 사라져 기억에만 남아 있고, 그 대신 마룻바닥을 깐 전문 탁구 클럽들이 어엿한 생활 스포츠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언제까지 탁구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라지볼도 있으니까 두 다리로 서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탁구를 쳐야겠지.
옛 친구와 우연찮게 조우한 김에 몇 자 적어보았다.
* 이 글을 읽고 이 탁구장에 대해 나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분이 탁구장 이름이 '신일'이라고 알려주었다. 제목을 고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한다.
영원한후보 - 이탁구장 이름은 신진탁구장이 아니고 신일탁구장입니다.
저 또한 이탁구장에서 43년전 고2때 열심히 동네 형님들에게 한 수 배우며 운동한 기억이 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늘씬하셨던 사장님과 두따님 그리고 동네 형님들 지금도 주변을 지날때면 그시절을 생각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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