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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말벌과의 조우

by 길철현 2023. 4. 20.

지난 한 달 정도 YG 서브 연습을 맹렬하게 해왔다.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벽에 눈을 뜨면 다시 잠이 들기도 어려워, 그 길로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산책을 한 다음 아파트 내에 있는 탁구장에서 홀로 서브 연습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 작은 탁구장은 나름 마룻바닥까지 갖추어서 시설이 나쁘지 않은데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내 서브 연습 전용 구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이 YG 서브 연마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아무리 해도 커트량이 늘지 않아 하수와의 시합에서는 좀 써먹을 수 있을 정도지만, 맞수나 고수와의 시합에서는 득보다 실이 컸다. 부단히 연습을 하면 커트량이 늘지 않을까 했으나, 손목이 유연하지 못한데다가 포핸드 그립이라 아무리 애를 써도 강한 커트를 넣는 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 동안 해온 연습이 아까워 포기를 못하고 있는데 요근래 그래도 커트량이 조금은 느는 느낌이라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하는 셈이었다.
 
이 날 아침에도 문을 열고 전등 스위치를 올린 다음 탁구대 앞에 서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서브를 넣으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드론이라도 날리는지 요란스럽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새벽부터 무슨 작업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는가? 짜증이 일어나는 걸 참으며 다시 서브를 넣으려는 찰나, 유리창 위쪽에서 붕붕거리고 있는 말벌 한 마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큰소리의 근원지는 밖이 아니라 탁구장으로 들어온 말벌 한 마리의 날개짓이었다. 

환기를 위해 아래쪽에 있는 작은 유리창을 좀 열어두었더니 호기심 많은 말벌 한 마리가 아마도 그 사이로 들어왔다가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위쪽에서만 부질없이 붕붕거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시하고 그냥 서브 연습을 하려고 했으나, 말벌은 일반 벌과는 달리 무시해도 될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통증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에 말벌에게 쏘이는 상황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말벌과 사람이 의사소통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래쪽에 있는 창문의 열린 부분으로 나가면 돼"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말벌의 귀(귀가 있기라도 한가?)에는 무의미한 아우성에 지나지 않으리라. 공을 주울 때 쓰는 잠자리채로 포획을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어설픈 내 솜씨로 괜히 말벌을 자극하다간 화를 자초할 듯하여 이내 접고 말았다. 
 
궁여지책이라고 했던가? 내 생각은 반대편에 있는 출입문을 열어 두는 것이 최상책일 것이라는 쪽으로 가닿았고, 문을 열어두자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이던 말벌은 내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양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고,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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