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론], 박종현 역주, 서광사(040831)
--해제
*이것이 씌어진 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에 대한 재판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이 남아 있었을 때였을 것이니, 실제로 법정에 입회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도 생존해 있었던 때였다. 게다가 그 많은 대화편 속에서 플라톤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는 단 세 군데 중의 두 군데(34a, 38b)에서 자신의 법정 입회를 증언하고 있는 터다. 따라서 기본적인 변론 내용은 법정에서 한 그대로였을 것이라 보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85-6)
*<소크라테스의 사형 쪽에 시민들이 찬성표를 던진 까닭>
1. 당시의 대부분은 아테네인들은 소피스테스들과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424/3(B.C.)년에 공연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표적인 소피스테스로 풍자되고 있다.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의 눈에 그런 인물로 비치고 있었다. (88)
2. 그<소크라테스>는 당대의 민중 지도자들을 참된 지도자들로 보지 않고, 오히려 민중을 선동하고 오도하는 자들로 보았는데, 이것이 그들의 반감을 샀다는 사실이다. (89)
*한창 잘 나가는 정치 지도자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소크라테스이니, 그<아니토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을 것임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일 것이다. 하고많은 날을 자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무지의 폭로로 보내고 있는 그를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된 아니토스가 앞서 [메논]편의 인용 구절에서 보였던 그런 위협적인 경고를 이제 구체화하는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성가신 존재를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 그것은 정치 지도자로서의 아니토스 자신의 위상을 손상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91)
*결론적으로 말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일생에 걸친 철학적 작업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그런) 몰지각과 부질없는 시기심 그리고 당대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의 (그런) 이기적인 적대심이 영합하여 빚은 어이없는 결말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런 영합에는 배심원(재판관)들에 대해 소크라테스 자신이 아첨하기를 단호히 거부한 것이 접착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93)
--본문
*동시대의 많은 아테네인이 그들의 전통적인 인습이나 믿음을 뒤흔들어 놓은 장본이 되는 것을 소피스테스들의 활동과 자연철학적 관심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떤 경위로든 이를 소크라테스와 연관시켜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100) 주석
*소크라테스는 죄를 지었으며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으니, 그건 땅 밑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는가 하면, 한결 약한(못한) 주장을 더 강한(나은) 주장으로 만들며, 또한 바로 같은 이것들을 남들에게 가르치고 있어서입니다. (106) 밀레토스를 비롯한 고소자의 선서진술서
*이 캐물음으로 말미암아 저에 대한 많은 증오심이 생겼는데, 그것도 아주 고약하고 심각한 것들이어서, 마침내는 이로 해서 많은 비방이 생겼으며, 또한 이 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도 된 것입니다. (122-3)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으로써 죄를 법하고 있다고 합니다. (127) 선서 진술서
*제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최대선)이기도 한 것은 이것이라고, 즉 [사람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에 관해서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서, 제가 대화를 하며 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캐물어 들어가는 중에 여러분께서 듣게 되시는 것들에 관해서 날마다 논의를 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캐묻지 않는 삶은 사람에게는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런 말을 하는 저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더더욱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175-6)
*아테네인 여러분! 어쨌든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여러분이 소크라테스를, 즉 현자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는 악명과 비난을 이 나라를 헐뜯고 싶어하는 자들한테서 여러분은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책망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비록 제가 지혜롭지 않을지라도, 물론 저를 지혜롭다고 말할 테니까요. (177)
[#Apology, Hugh Tredennick, tr., Penguin]
*Socrates is guilty of corrupting the minds of the young, and of believing in deities of his own invention instead of
the gods recognized by the State. (54) [Meletus' indictment]
*Where a man has once taken up his stand, either because it seems best to him or in obedience to his orders, there I
believe he is bound to remain and face the danger, taking no account of death or anything else before dishonour. (60)
[소크라테스의 강직성과 절제 등은 보통 사람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이다.]
*No one knows with regard to death whether it is not really the greatest blessing that can happen to a man; but
people dread it as though they were certain that it is the greatest evil; and this ignorance, which thinks that it knows what it does not, must surely be ignorance most culpable. (60)
[죽음에 대한 두려움--죽음과 연관된 고통, 상실 등--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냉철한 이성적인 탐구의 결과일지는 모르지만, 비인간적이다.]
*I spend all my time going about trying to persuade you, young and old, to make your first and chief concern not for your bodies nor for your possessions, but for the highest welfare of your souls, proclaiming as I go 'Wealth does not
bring goodness, but goodness brings wealth and every other blessing, both to the individual and to the State.' (62)
[‘영혼을 갈고 닦는 것’에 중점을 두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태도는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Death is one of two things. Either it is annihilation, and the dead have no consciousness of anything; or, as we are
told+, it is really a change: a migration of the soul from this place to another. Now if there is no consciousness but
only a dreamless sleep, death must be a marvellous gain. I suppose that if anyone were told to pick out the night on
which he slept so soundly as not even to dream, and then to compare it with all the other nights and days of his life,
and then were told to say, after due consideration, how many better and happier days and nights than this he had
spent in the course of his life--well, I think that the Great King++ himself, to say nothing of any private person,
would find these days and nights easy to count in comparison with the rest. If death is like this, then, I call it gain;
because the whole of time, if you look at it in this way, can be regarded as no more than one single night. If on the
other hand death is a removal from here to some other place, and if what we are told is true, that all the dead are
there, what greater blessing could there be than this, gentlemen? If on arrival in the other world, beyond the reach of
our so-called justice, one will find there the true judges who are said to preside in those courts, Minos and
Rhadamanthys and Aeacus+++ and Triptolemus^ and all those other half-divinities who were upright in their earthly
life, would that be an unrewarding journey? . . . and above all I should like to spend my time there, as here, in
examining and searching people's minds, to find out who is really wise among them, and who only thinks that he is. (74-5)
+the doctrines of the soul's immortality and rebirth, and of purification by punishment in the underworld belong to
Orphism, a primitive but in some ways remarkably enlightened religion which perhaps came to Greece from Thrace
and certainly inspired the 'mystery cults' which were practised in various parts of Greece, especially at Eleusis in
Attica. These were liable to abuse and were conventionally regarded with some disdain, but they were a valuable
supplement to the formalities of official religion. Orphism was largely adopted by the Pythagoreans, who had a great influence upon Socrates and Plato.
++Persian King
+++These were by tradition mortal sons of Zeus, and became judges in the underworld as a reward for their earthly
justice and piety.
^ was the introducer of agriculture and had an important part in the cult of Demeter at the Elusinian Mysteries. He is not described elsewhere as a judge of the dead.
<정리>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전적 의미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는 뜻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변명‘보다는 ’변론‘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데 -- 은 알다시피 멜레토스(Meletus) 등에게 고소를 당한 소크라테스가 고소자들에게 반론을 펴고, 또 법정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그런 글이다.
당시 그리스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좀더 뒤따라야 하겠지만,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아마도, 소크라테스 자신이 순교를 결심한 데에도 그 까닭이 있지 않나 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형으로 ‘추방’을 주장했더라면 그렇게 되었으리라. 그런 사정을 젖혀 두고라도, 소크라테스가 투표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산파술로 많은 시민들을 불쾌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라는 것, 또 이 밖에도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멜레토스의 고소를 반박하는데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산파술적인 논리”를 잘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밖에 이 글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점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인간 사고의 궁극점이 ‘영혼을 최대한 갈고 닦는 것(the highest welfare of your souls)'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삶의 목적을 그는 이렇게 정의 내렸고, 그것이 그에게는 진리라는 점이다. 이 점이 소크라테스가 비난받는 점이며, 또 그 혹은 플라톤의 철학이 신학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는 징표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우리는 그가 인지상정을 넘어선 인물이라는 생각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된다. 그의 언급과 햄릿의 구절을 잘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리라.
*안광복 풀어씀,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 사계절
*(변명)이라고 표기한 부분은 플라톤이 쓴 [변명] 원문 번역.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과연 무엇을 가르쳤을까? 놀랍게도 그는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 그는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을 뿐이다. (20)
*그에게는 생업보다 자만심에 찬 시민들의 무지를 깨부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22)
*(변명)이제까지 고발자들은 진실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저에게서 오직 진실만을 듣게 될 것입니다. (40)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되기 쉬웠다. 이 재판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정의를 아는 법 전문가나 일자무식한 백수건달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은 항상 전문지식과 식견을 갖춘 사람들보다 많은 법이다. 재판은 ‘어리석은 자들의 결정’으로 흐르기 쉬웠다. (42)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걸린 까닭은 아마도 아테네 정세에서 찾아봐야 할 듯싶다. 당시 아테네의 분위기는 9*11 테러 직후의 미국과 꽤나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판이 열리기 2년전, 30인 참주 독재의 끔찍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테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독재자들은 시민들을 대량 살해와 암살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수백 년의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아테네에서 독재정권이 성공하기란 어려웠다. 정권은 몇 달 안 되어 붕괴되었고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회복되었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 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역의 주역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를 배신했던 알키비아데스, 30인 참주의 지도자였고 쿠데타의 주범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 이들은 모두 한때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이다. (52-3)
*훨씬 후대의 기록이지만,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구름] 때문에 기분 나빴는지를 묻자 그는 “희극 작가들이 나를 극장에서 놀림감으로 삼을 때 나는 좋은 친구들과 커다란 연회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유쾌하게 대꾸했다는 기록도 있다. 만약 희극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정색을 하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65)
*(변명) “나는 이 사람보다 현명하다. 우리 인간들 중 누구도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좋은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알지 못하기에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런 조그만 차이 때문에 나는 그보다 현명해 보이는 것이다.” (76)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자신의 무지함과 한계를 알고 항상 겸허한 마음을 지니라는 뜻이다. (90)
*요컨대, 예술은 ‘인격 수양’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에서 벗어난 예술은 삶을 타락시키는 ‘딴따라 짓거리’일 뿐이다. 예로부터 이상사회를 꿈꾸는 성인군자들의 예술관은 이처럼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지금도 끊임없이 비판받고 있다. 이들에 따르자면 이상적인 인간이란 로봇에 가깝지 않을까? 로봇에게는 한 치의 감정도 없다.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플라톤식의 냉철한 이성을 지닌 인간은 감정에 휩싸이는 법이 없이 ‘논리 회로’에 따라 올바른 것만 바라보고 행동한다. 실수도 착각도 없는 사람, 과연 그가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현대에는 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 대한 반발로 감성과 욕망을 옹호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일고 있다.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91-2)
*(변명) 신탁의 뜻도 아마 “인간의 지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다지 가치가 없다.”는 것일 테지요. (93)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지혜란 ‘인간의 아레테에 대한 지식’이다. 곧,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정받는 인재로 만들어 주는 지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98-9)
*‘아폴론 전사’를 현대 버전으로 풀어서 설명하면, ‘죽음의 두려움에도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을 정의롭게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108)
*소크라테스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항한 투사’이다. 그는 아테네를 몰락시킨 주범으로 민주주의를 꼽았다. ([변명]의 주제를 ‘민주주의 비판’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이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이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이해관계가 걸린 대중의 눈치를 보느라 얼마나 많은 정책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구태여 예를 들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117-9)
*민주주의란 뛰어난 사람이나 덜 떨어진 사람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이상한 제도이다. (119)
*‘송양지인(宋襄之人)’이라는 고사를 봐도 그렇다. 중국 춘추 시대에 초나라와 송나라가 전쟁을 벌였단다. 초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느라 대열이 어지러워진 틈에, 송나라 장수들은 군주에게 청하여 이들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군주의 대답은 ‘노!’였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적을 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 송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고 만다. 이것은 선한 군주가 국가를 쇠망의 길로 이끈 경우이다. (125)
*올바른 행동이란 결국 우리네 이성에 따른 행동을 말한다. 악한 행동이란 ‘욕망의 논리’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덕이란 곧 지식이다.”는 유명한 ‘소크라테스 공식’을 이해할 수 있다. 영혼에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절대로 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란 뜻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누구도 악행을 ‘의도적으로’ 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구태여 하려는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악행은 무엇이 정말로 영혼에 이로운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올 뿐이다. 정말로 영혼에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누구도 악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소크라테스 ‘지행합일’의 의미이다. 자기는 결코 ‘의도적’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을 리 없다는 그의 주장과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128)
*“소나 말, 사자에게 손이 있었다면 자기 모습을 닮은 신을 그렸을 것” (135) 크세노파네스의 말
*논박술의 핵심 기술은 ‘모순’에 있다. 상대방의 주장을 기초로 논리를 전개해 보면 마침내 원래의 주장에 정반대 되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블라스토스라는 걸출한 학자는 이 논박술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1. ‘갑’은 A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2. 소크라테스는 계속 질문을 던지며 ‘갑’이 B와 C(필요하면, D, E, F. . . 식으로 계속)를 받아들이게끔 한다.
3. 그런데 B와 C는 A와 모순 되는 것이다.
4. ‘갑’은 B와 C를 분명하게 받아들인 상태라 원래 확신하던 A라는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5. 따라서 ‘갑’은 A라는 믿음이 잘못되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공식에다가 A에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는다.”를, B에는 “영적인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인 존재도 믿는다.”를, 그리고 C에다 “영적인 존재는 신의 산물이다.”를 각각 넣으면 결론은 밀레토스 자신의 처음 주장과는 모순 되게도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는다.”는 주장이 나오고 만다. (143-4)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교육학에서 발견학습이나 자기주도적 학습의 ‘원조’로 대접받는 교육 기술이기도 하다. (145)
*(변명) 아테네 사람들이여! 진리란 이런 겁니다. 만약 어떤 장소가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머무르기로 했다면, 또는 장군이 그곳에 머물라고 명령 내렸다면, 저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장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나 명예롭지 못한 다른 일들로 고민하지 않고 말입니다. (150)
*(변명) 제가 살아 있고 계속할 수 있을 때까지 저는 지혜를 사랑하는 일과 그대들에게 충고 하는 일, 그대들 중 누구와 마주치건 이 점을 일깨우는 일을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152)
*(변명) 제가 돌아다니며 한 일이란, 젊건 나이 든 사람이건 간에 설득하여 영혼을 최고로 만드는 것보다 육체와 돈에 더 많이 신경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54)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확신범의 ‘원조’ 격이다. 확신범들은 현실보다 오히려 그네들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완벽한 세상의 모델을 더 신뢰한다. 그들은 세상에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른 길’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머릿속의 완전한 지도에 따라 현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그들은 현실에서 찾기 힘든 완벽함을 구하려고 하는 이상주의자들이다. (156)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모든 비판을 불가능하게 하는 ‘닫힌 사회’의 원흉이라 지적한다. 절대적인 진리는 절대악을 낳을 뿐이다. 확실히 소크라테스에게는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얕잡아 보는 측면이 있다. (158-9)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는 사회질서가 점차 붕괴되어 가고 이기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음을 기억하자. 이상주의는 기존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무엇이 제대로 된 삶인지 헷갈릴 때 빛을 발한다. 모두가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쓰는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부나 명예보다는 무엇이 과연 옳고 그른지에 신경 써라.’고 외치는 소크라테스는 부패해 가는 사회를 다잡아 주는 소금이었던 것이다. (159)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말하곤 했다. (173)
*우리는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이 저의 제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저는 똑같이 행동했다.”는 짧은 구절 속에서 고발자들이 왜 그의 사형을 요구했고 법정에 세운 이상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조국 아테네를 버리고 스파르타에 붙는 결정적인 배신을 한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30인 참주정의 지도자 격이었던 크리티아스와 크라미데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로 여겨졌던 것이다. (178-9)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주지주의로 분류된다. 주지주의란 이성적 앎과 판단이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주장을 말한다. [변명]은 머리로만 읽는 책이 아니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도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던져 버릴 수 있는 냉철한 이성에서 온다. 이성이 올곧게 인도하는 감정,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호소력 있는 감정’이다. 소크라테스는 차고도 명료한 이성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91)
*(변명) 죽음을 피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악함을 피하기는 훨씬 더 어렵습니다. (206)
*어찌 보면 바르게 사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고통스러운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뜻인 듯도 하다. 될 수 있으면 약빠르게 대충 살고 싶은 게 보통 사람의 심정일 것이다. 허나, 그러려고 하면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은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인간은 완벽하게 도덕적이지도 못하면서 그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이다. (217)
*그래도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소크라테스처럼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인간이 참된 인간이라고. 삶의 욕구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그것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이다. (219)
[독서 감상문]
(040902)안광복이 풀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는 우리를 2500년 전의 그리스 아테네로 초대한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에게, 25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보다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필자는 청소년들이 쓰는 속어까지도 서슴지 않고 동원하고 있다. 필자 자신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김빠진 사이다에 김을 불어넣’기 위해서 상당히 애를 썼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긴 하지만, 고전에 제대로 다가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지난한 일이다. 가장 먼저 언어라는 장벽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으며, 거기다 시간과 공간의 거리감에서 오는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고방식의 격차도 넘기 힘든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읽으려 애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필자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인간이 이 삶을 살아가면서 본질적으로 부닥치게 되는 문제들--뭉뚱그려 말하자면 이 삶은 무엇이고, 또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은 시간과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전 사람들이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어떠한 견해와 태도를 표명했는지를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의 우리 삶의 방향성 내지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이전에도 몇 번 읽은 글이고(사실 이 글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관련된 일련의 글 [에우티프론], [크리톤], [파이돈] 등과 같이 읽으면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나름대로 생각이 없지도 않지만, 이번에 안광복의 설명과 함께 읽어 나가면서는, 소크라테스가 당시 고발을 당해야만 했던 상황이나, 또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혹은 피할 수 있는 죽음을 당당히 택한 까닭 등에 좀더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으며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죄명으로 기소된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자신을 심판할 배심원(재판관)들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역설한 법정 변론이다. 물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변론 내용은, 당시에는 녹음기나 캠코더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이 법정에 직접 참석했던 그의 제자 플라톤이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 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내용은 같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플라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안광복은 “[변명]은 정확한 변론 기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법정 드라마’이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플라톤이 각색한 ‘소설’인 것이다(30)”라고 적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도입부에서 자신의 변론은 ‘아름답게 잘 꾸미고 세심하게 정돈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뿐이라고 하지만, 글의 전개에 있어서의 치밀함이나, 논리 정연함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이다. 특히 특유의 논박술을 활용하여 밀레토스의 기소 내용이 모순임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저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이 글의 저자인 플라톤의 천재성에 일정 부분 빚지고 있는 것이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 변론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는 이 같은 냉철함이 비인간적--물론 소크라테스의 주장대로라면 죽음이라는 것이 오히려 환영할 만한 것이기에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모습이겠지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기소를 당하게 된 까닭과 배경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가 변론 과정에서 직접 밝힌 부분과, 안광복의 설명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첫째는 이 당시 아테네인들은 소피스트들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믿음이나 관습을 뒤흔드는 존재로 보았는데, 소크라테스도 그러한 소피스트 중의 한 명이라고 오해했다는 것, 둘째는 당대의 지도자들--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토스--의 무지를 폭로함으로써 그들의 반감을 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판이 열리기 2년 전(B. C. 401년)에 일어난 쿠데타의 장본인들이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이들이었다는 것 등이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조정을 받는 참주들의 가혹한 독재 정치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해 나가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쿠데타로 일어난 정권이 몇 달 후에 붕괴되었으니, 아테네 시민들은 당연히 이 쿠데타의 주역과 가까운 사이로 여겨지던 소크라테스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발자들의 의도가 굳이 소크라테스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왜 소크라테스는 추방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그것은 고발자들이 의도한 대로 따름으로써, 그들이 쳐놓은 덫에 걸리지는 않겠다는 것이고, 또 죽음 앞에서 자신이 평생을 지녀온 신념을 굽히는 비굴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리라.
서구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현재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최선의 정치체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근대 올림픽의 전신인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던 그리스에서 역사상 가장 현명한 인물 중의 한 명을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죄명(소크라테스가 한 일이라곤 그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그 어떤 일보다도 그대들 자신이 최선의 상태가 되고 가장 분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에 관심을 두라고 설득(197)’을 한 것뿐이었는데)으로 사형에 처했다는 사실은, 그것도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역사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예언대로 그의 손을 들어주고 있으니, 진정한 승리자는 소크라테스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그리고 갖가지 컴퓨터 게임에 물들어 점점 더 책을 멀리하고 있는 요즈음의 청소년들에게 이 책이 안광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죄의 판결을 받은 뒤에도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날마다 덕, 또는 저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는 것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199)’라고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밝힌다. 소크라테스의 소신에 우리가 동의를 하든 않든 간에, 자신의 육체를 보살피며, 재화를 획득하는 일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다시 한번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자면,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말 것이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인다면, 이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통용되어 왔지만, 그 보다는 ‘소송 당사자나 변호인이 법정에서 하는 진술’을 뜻하는 [변론]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변명’은 사전적 의미를 본다 하더라도 이 책의 내용을 담기에 부족하고, 거기다 현재의 우리말 쓰임에 있어서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해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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