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9일
잠에서 깨 휴대폰을 보니 6시 40분이었다. 평화공원에 갔다 와서 체크아웃을 하면 될 듯했다. 전날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로 들어오는 길에 평화공원을 경유한다고 되어 있는 걸 보고는 나는 그곳이 시 외곽에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그래서 먼저 그곳을 들렀다가 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공원은 시 중심지에 있었고 종착지인 고속버스터미널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내가 묵고 있는 오리온 호텔에서도 멀지 않아 거리 구경도 할 겸 나는 걸어갔다 오기로 했다.
30분 좀 넘게 걸려 평화공원에 도착했다. 먼저 '원폭낙하중심지'부터 찾아보았다(이곳을 따로 원폭낙하중심지 공원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위 안내판은 1945년 8월 9일 당시의 폭탄 투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다음, 두 번째 투하 지점은 원래 고쿠라(지금의 기타큐슈)였으나 B29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구름으로 인해 시야를 확보할 수 없어서, 나가사키로 목표 지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날씨가 수십만 명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컬하다. 당시 나가사키의 인구가 24만 명 정도였는데 사망자가 73,884명, 부상자 74,909명이었다고 하니 원자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원폭 낙하 중심지 주변에는 각종 추모비와 기념비가 있었다.
이 추도비는 나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인들이라고만(조선인이 있더라도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제징용 등으로 일본, 그것도 나가사키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중 2만 여명이 피폭 당하였으며 그 중 1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히로시마에서는 3만여 명 사망). 이 추도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반대를 무릅쓰고 추도비를 '세운 사람은 조선인 강제 연행, 강제 노역, 그리고 조선인 피폭자 실태 조사와 활동에 평생을 바친 오카 마사하루'(인터넷에서 인용) 신부라고. 이 분에 대한 다른 자세한 정보가 없지만, 그 노고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가사키를 찾은 것이 꼭 이곳, 원자폭탄 투하 지역을 방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을 찾고 보니 나가사키와 원자폭탄, 그리고 그 폭발이 불러온 상상을 초월하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응결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강제징용 등으로 1만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된 일이라는 자각도 뒤따랐다.
나가사키에 앞서 최초의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히로시마 시민들 어느 누구도 1945년 8월 6일 아침 한 대의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 하나가 그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가사키 시민들도 자신들의 머리 위로 엄청난 재앙을 담은 폭탄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와 함께 등장한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은 전세계를 휩쓸다시피 한 거대한 전쟁을 등에 업고 원자폭탄의 개발에 성공했고,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이름 아래 수십 만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거기다 더 많은 사람들을 오랜 시간 고통 속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Truman, 진짜 인간)이 오랜 전쟁의 피로감 속에서 원폭 투하를 승인할 때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적국인 일본이 입을 피해가 아니라 자국 군대의 인적*물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전세계는 놀랐고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과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양자역학은 인류의 머리 위에 죽음을 띄워 놓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78년 전인 이 당시 나의 어머니는 일본에 돈을 벌러 온 외할아버지와 함께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도쿄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더라면? 머리를 짓누르는 여러 생각들로 발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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