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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일본 규슈 여행

일본 규슈, 나 홀로 6박 7일(12) - 나가사키 평화공원 1 : 원폭낙하중심지(20231029)

by 길철현 2023. 12. 13.

- 10월 29일

 

잠에서 깨 휴대폰을 보니 6시 40분이었다. 평화공원에 갔다 와서 체크아웃을 하면 될 듯했다. 전날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로 들어오는 길에 평화공원을 경유한다고 되어 있는 걸 보고는 나는 그곳이 시 외곽에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그래서 먼저 그곳을 들렀다가 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공원은 시 중심지에 있었고 종착지인 고속버스터미널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내가 묵고 있는 오리온 호텔에서도 멀지 않아 거리 구경도 할 겸 나는 걸어갔다 오기로 했다.  

전날 버스에서 보았던 천리교 교회. 고에초(肥長 비장)는 무슨 뜻일까? 지인이 이 글자는 창문에 적힌 대로 훈독을 해서 히나가(ひなが)로 읽는 것이 맞을 듯하다고 했다.

 

마무리 공사에 들어간 대형 신축 건물
높은 곳에 위치한 성덕사 공수도장. 절에서 도장을 운영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공수도란 말은 워낙 오랜만에 접해서 이 말이 가라데를 가리킨다는 것도 아삼삼하다.
또 다른 대형 쇼핑몰, 미라이 나가사키 코코워크. 대관람차가 이채롭다.
18친화은행,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쓸 수 없는 상호. 이 은행은 18은행과 친화은행의 합병으로 생긴 것이라는데, 18은행은 열여덟 번째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플랫 몰(Plat Mall)

 

30분 좀 넘게 걸려 평화공원에 도착했다. 먼저 '원폭낙하중심지'부터 찾아보았다(이곳을 따로 원폭낙하중심지 공원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전철원폭순생자 추도비. 순생자라는 말은 일본에서도 쓰지 않는 말인 듯하여, 좀 흘려서 쓴 글자가 생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의미는 희생자라는 뜻인 듯.
일반 도로와 전철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어서 석축을 쌓았는데, 원폭 낙하 중심지에서 400여 미터 떨어진 하마구치마치 정거장의 석축 일부를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원자폭탄 폭발 50주년을 맞아 조성한 조형물. 공원 왼편에 서 있는 나오키 토미나가의 이 조형물은 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의 축 늘어진 팔과 다리가 그날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금 전에 본 성덕사(쇼토쿠지)란 이름을 이곳에서 다시 접하게 되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성덕사는 1626년에 창립된 유서깊은 사찰인데 원자폭탄의 폭발로 성덕사의 건물과 석탑, 묘비석 등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이 석등들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194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위 안내판은 1945년 8월 9일 당시의 폭탄 투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다음, 두 번째 투하 지점은 원래 고쿠라(지금의 기타큐슈)였으나 B29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구름으로 인해 시야를 확보할 수 없어서, 나가사키로 목표 지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날씨가 수십만 명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컬하다. 당시 나가사키의 인구가 24만 명 정도였는데 사망자가 73,884명, 부상자 74,909명이었다고 하니 원자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45년에 세워졌던 원폭 낙하 중심지를 표시하는 푯대.
현재 원폭 투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검은 비석. '원폭순난자명봉안'이라는 문구가 앞에 써있다. 희생자라는 말 대신에 순국선열과 비슷한 의미인 순난자를 쓴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이 잔해는 이곳에서 500m 북동쪽에 위치한 우라카미 성당의 벽 잔해 중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폭발 당시 지층의 상태
완전한 폐허가 따로 없다.
원폭 중심지 주변 지도.

 

원폭 낙하 중심지 주변에는 각종 추모비와 기념비가 있었다. 

평화를 기도하는 아이.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이 추도비는 나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인들이라고만(조선인이 있더라도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제징용 등으로 일본, 그것도 나가사키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중 2만 여명이 피폭 당하였으며 그 중 1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히로시마에서는 3만여 명 사망). 이 추도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반대를 무릅쓰고 추도비를 '세운 사람은 조선인 강제 연행, 강제 노역, 그리고 조선인 피폭자 실태 조사와 활동에 평생을 바친 오카 마사하루'(인터넷에서 인용) 신부라고. 이 분에 대한 다른 자세한 정보가 없지만, 그 노고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건설노동자들이 세운 위령비
전기통신 노동자 원폭 위령비

 

그리스에서 가져온 평화의 불꽃.
평화의 모자상
미국의 포트랜드 시민들이 기증한 석등.
원폭 자료관은 시간이 일러 입장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했다.
희망의 비

 

나가사키를 찾은 것이 꼭 이곳, 원자폭탄 투하 지역을 방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을 찾고 보니 나가사키와 원자폭탄, 그리고 그 폭발이 불러온 상상을 초월하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응결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강제징용 등으로 1만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된 일이라는 자각도 뒤따랐다. 

 

나가사키에 앞서 최초의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히로시마 시민들 어느 누구도 1945년 8월 6일 아침 한 대의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 하나가 그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가사키 시민들도 자신들의 머리 위로 엄청난 재앙을 담은 폭탄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와 함께 등장한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은 전세계를 휩쓸다시피 한 거대한 전쟁을 등에 업고 원자폭탄의 개발에 성공했고,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이름 아래 수십 만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거기다 더 많은 사람들을 오랜 시간 고통 속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Truman, 진짜 인간)이 오랜 전쟁의 피로감 속에서 원폭 투하를 승인할 때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적국인 일본이 입을 피해가 아니라 자국 군대의 인적*물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전세계는 놀랐고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과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양자역학은 인류의 머리 위에 죽음을 띄워 놓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78년 전인 이 당시 나의 어머니는 일본에 돈을 벌러 온 외할아버지와 함께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도쿄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더라면? 머리를 짓누르는 여러 생각들로 발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