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빠져나와 운젠 온천 중심가로 들어섰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은 데다 시계가 벌써 두 시 반을 향해 가고 있어서 요기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급한 대로 조일식당으로 들어가서 메뉴판을 받아들었는데, 말도 글도 모르니 사진으로 올라와 있는 나온 만만한 돈가스를 시켰다. 맛있는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허기진 배를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식사를 하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조금 전 오시도리 저수지에서 짐작한 대로 산 정상 부근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있었다(2017년 일본을 처음 찾았을 때 도쿄 근교의 관광명소인 하코네에 갔다가 알게 된 것이지만 케이블카를 일본에서는 로프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본의 케이블카는 경사로를 오르내리는 노면전차 같은 것이었다). 1000엔으로 딱 떨어지고 신용카드 결제기도 보이지 않아 그냥 현금으로 결제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이곳으로 들어올 때 본 증기가 솟아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호텔로 보이는 깔끔한 건물 뒤쪽에서도 증기가 올라오는 곳이 있어서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전망대 표시가 있어 올라가 보았는데, 별로 조망이 좋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내려가니 조금전에 보았던 온젠(온천) 신사 경내였다. 이 온센신사는 701년에 설립된 나가사키 현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곳이었다.
뉴스에 총리를 비롯하여 일본의 각료나 정치인들이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바치거나 참배를 했다는 소식이 빈번하게 나와, 신도나 신사에 반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신전 앞에서 박수를 치고 또 줄을 당기며 참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비쳤다. 원래 토속 신앙이었던 신도가 덴노(天皇 천황) 숭배와 결탁하게 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라고 하던데.
다시 도로를 따라 좀 걸어가니 조금 전에 보았던 깔끔한 건물 앞이었다. 간판이나 상호 등이 안 보여 무슨 건물인가 했는데, 입구에 조그맣게 '카이(界 계) 운젠'이라고 표시된 입간판이 보였다. 예상대로 이곳은 2022년에 개장한 호텔로, 카이는 아파 그룹 계열인 호시노 리조트의 브랜드였다.
카이 호텔 바로 옆에 본격적인 '운젠 지고쿠'가 펼쳐지고 있었다. 달걀 썪는 냄새와 비슷한 유황 냄새가 가득하고 땅 속에서 피어오르는 증기와 열기 등이 흡사 지옥을 연상시킨다고 해 온천의 지열지대를 '지고쿠'(지옥)라고 부른다는 건 유튜브 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규슈를 너머 일본 전체에서도 최대 온천 단지인 벳푸에서는 이런 지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관람료까지 받고 있었다. 운젠 지옥도 운젠 온천의 대표 관광명소인데, 무료라 산책로를 따라 부담 없이 걸어 나갔다.
(안내문) 운젠 지옥은 시마바라 반도 중앙에 우뚝 솟은 운젠다케의 '호흡'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운젠다케의 마그마 공간은 이곳 서쪽의 다치바나 만 해저 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운젠다케의 주봉인 후겐다케의 헤이세이 분화(1990~1995년) 시에는 마그마 공간에서 마그마가 상승하여 화구를 통해 분출되었지만, 평소에는 화산 가스만 상승하고 있으며, 지하수나 빗물과 섞여 온천이 됩니다. 오바마 온천, 운젠 온천, 시마바라 온천은 동일한 마그마 공간에서 유래하지만, 마그마 공간과의 거리에 따라 화산 가스의 성분이 변화하기 때문에 각각 수질과 색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운젠 지옥은 고온의 황화수소가 지표의 암석을 녹여 하얀 진흙을 만들고, 하얀 분기와 함께 주변 일대를 뒤덮은 모습이 마치 생명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지옥'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늘지기와 철쭉류 같은 황화수소에 비교적 강한 식물이 분포해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 ㅡ다케(岳 악): 우리의 경우 설악산, 운악산, 재악산처럼 높고 험한 산을 가리킬 때 중간에 '악'자가 많이 들어가는데, 일본에서는 이 한자어의 원래 뜻인 '큰 산'을 살려 '다케'(악)으로 끝나는 산들이 많다. 운젠에 있는 고봉들도 후겐다케, 묘겐다케 등으로 불린다.
처음 마주한 지옥은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는 세이시치( 清七 청칠) 지옥이었다. 나가사키 시의 니시자키 공원과 마찬가지로 이 지옥의 이름 역시도 기독교도 처형과 관련이 있다. 세이시치라는 기독교인이 처형되고 난 다음 분출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스즈메(雀 작) 지옥은 지하에 흐르는 물과 올라오는 증기가 참새가 짹짹되는 소리와 유사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온천수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소리에는 참새가 몇 마리 들어있는지?
오이토(お糸) 지옥은 청회색의 온천수 웅덩이가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오이토는 세이시치 지옥처럼 사람의 이름으로, 간통을 하고 남편까지 살해한 여인인 오이토가 처형되고 난 다음 분출하기 시작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유래는 섬뜩하기 짝이 없다.
이런 온천 지열지대는 2017년 백두산 장백폭포 지역에 갔을 때 처음으로 보았는데, 이곳은 물은 거의 없고 증기만 솟구치는 것이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열기로 하얗게 변해버린 풍경이 이색적이긴 했으나, 사실 이색적이라는 것 이상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운젠 지옥의 하이라이트로 증기가 분출되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지옥의 울부짖음 같은 다이쿄칸(大叫喚 대규환) 지옥은 아쉽게도 놓치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을 참조하며 좁은 도로를 따라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증기를 좇아서 갔다가 운젠 지옥을 정신없이 대충 한 바퀴 돌았다. 이날은 다른 날에 비해 증기의 분출량이 적은 날이어서 지옥 같은 분위기가 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화산 지대 특유의 지형이라 이색적으로 다가오긴 했다. 아니 그보다는 단단한 지반 아래에서 지구가 살아 숨 쉬고 또 들끓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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