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4시 10분이었다. 오시도리 저수지와 운젠 지옥을 중심으로 온천 지구를 돌다 보니 이곳에서 두 시간 반 이상을 보낸 셈이었다. 다시 한번 안내책자를 꺼내 '운젠 케이블카'(로프웨이) 운행 시간을 살펴보니 4월부터 10월까지는 5시 20분까지 운행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차로 15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고 했다. 구글 지도를 보니 길은 외길인 데다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될 듯해서 내비에다 따로 입력하지 않고 출발했다.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니 앞에 버스가 천천히 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나기도 했으나 추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한편으로는 이 버스가 혹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의 여파로 운행이 중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버스는 좌회전을 한 다음 마을로 들어가고, 나는 이곳 운젠 온천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57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좌회전해서 389번 국도의 꼬불꼬불한 내리막을 한참 내려가다가 반대방향으로 잘못 왔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 케이블카를 못 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어느 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다음 후진을 하는데 뒤쪽 공간이 좁은 데다 오른쪽 좌석에 앉아서 후진을 하는 것이 영 어색했다.
다시 한번 길을 거슬러 올라 이번에는 니타 고개로 들어섰다. 이곳이 운젠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 맞는 것 같은데 안내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정말로 맞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단은 좁고 가파른 고갯길을 따라 올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노인분이 차를 세우고 뭐라고 했다. 입장료인가 했더니 '환경보전협력금'으로 100엔을 징수하고 있었다. 법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소액이라 군말 없이 내었다. 운젠 로프웨이로 가는 길이 맞느냐? 고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영어로 묻는 것도 어색하고 해서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아주 오래전(이십몇 년 전쯤)에 경기도 가평군의 어느 지방도로를 달리는데 그곳에서도 환경보존금 명목으로 천 원인가를 받아서 차를 돌려 나온 것이 떠올랐다. 몇 년 뒤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는 더 이상 그 이해하기 힘든 징수는 하지 않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차가 하나도 없는 것을 의아해하다가 일방통행 도로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좁고 굽이치는 도로를 십여 분 가까이 올라갔을까?
나무 하나 없는 황폐한 산봉우리가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저런 산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정상 부분에는 풀도 자라지 않는 듯 맨 흙만 있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 있었던 듯했다. 케이블카 마감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전망대에 잠시 올라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 안내문을 좀 읽어보니 이 산은 1990년 전에는 없다가 화산 폭발 때 새로 생겨난 산으로 현재 운젠 산군의 최고봉이라는 말인 듯했다. 화산이 폭발하면 정상 부분이 날아가서 낮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산이 새로 생겨나다니?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화산이라고는 쥐 죽은 듯 고요한 한라산밖에 없는 우리나라(깜빡했는데 울릉도도 화산섬이구나)라, 외국에서 화산이 분출했다고 해도 그야말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영어 안내문 번역) 이곳은 니타 고개의 제2전망대입니다. 맑은 날이면, 헤이세이 신잔(平成新山 평성신산 1,483m) 정상을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아리아케 해 방향으로 시마바라 시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1990년 11월 이전에는, 헤이세이 신잔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망대에서는 후겐다케(普賢岳 1,359m)를 볼 수 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이 산은 시마바라 시 지역의 좀 더 낮은 봉우리들을 포함하여 시마바라 반도의 최고봉이었습니다. 1990년 말에 화산 활동이 시작되었고, 다음 5년에 걸쳐 용암 돔(dome)이 생겨났다가 붕괴하는 와중에, 파괴적인 산사태로 뜨거운 가스, 재, 진흙 등이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렸습니다.
1991년 6월 3일, 화산 분출과 함께 발생한 화산쇄설류로 인해 43명이 죽고 2,000 이상의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화산쇄설류의 잔해는 멀리 아리아케 해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분출 직후 찍은 사진들은 지속적인 분출로 황폐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자연은 회복력이 강합니다. 게다가 운젠 화산의 이번 분출이 산자락에 사는 지역 사회를 처음으로 파괴한 것도 아닙니다. 1998년이 되자, 헤이세이 신잔은 완전히 안정화되었고, 지난 20여 년에 걸쳐 산의 생태계는 빠르게 복구되었습니다. 운젠 고유종인 식물들은 화산 토양에서 잘 자라며, 그래서 풀과 관목들이 먼저 산비탈로 돌아왔습니다. 나무들도 분출이 있고 10년이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헤이세이 분출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며, 대부분의 식생이 다시 자리를 잡아 풍경이 예전 모습을 찾은 현재, 분출 직후의 황폐화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
서둘러서 바다 쪽을 보면서도 사진을 몇 장 찍고는 계속 차를 몰고 갔다.
몇 분 더 차를 달려 니타 고개의 정상, 운젠 케이블카가 있는 곳에 도착한 시각은 다섯 시. 많이 지체되긴 했으나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오솔길을 따라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갔더니 매표소가 어디인지 알기도 힘들고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케이블카를 타는 곳까지 가보았더니 직원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운행이) 끝났느냐"라고 영어로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답답한 김에 "시마이?"라는 말도 했던가?). 내 안내 책자가 코로나 이전에 나온 것이라 운행 시간이 현재는 단축된 모양이었다(사전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낭패를 보았다. 내 안내 책자에는 "닛타토케 고개 로프웨이"라고 나와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운젠 로프웨이"이다. 글을 쓰며 영어로 구글에 "Unzen Ropeway"라고 치니 운행 시간이 8시 30분에서 5시까지라고 나와 있다). 아쉬움이 크긴 했으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운젠 온천에서 출발할 때 반대방향으로 가서 시간을 허비하지만 않았어도. 이곳 니타토케 역과 묘켄다케 역의 표고차가 174m밖에 나지 않아 이곳에서도 충분히 조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억지 위안을 삼아야 했다.
이곳 니타 고개 정상은 제1전망대이기도 해서, 제2전망대에서 보았던 헤이세이 신잔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시마바라 시와 그 너머 바다도 다시 한번 보면서 카메라에도 담았다.
운젠 지옥의 끓어오르는 온천과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수증기, 그리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무는 물론 풀조차도 자라지 않는 헤이세이 신잔의 정상부는 견고한 토양 위에 안전하게 서 있다는 내 평소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지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물론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열로 온천을 누리기도 하지만)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운젠 산군의 최고봉이 후겐다케에서 30여 년 전에 헤이세이 신잔으로 바뀌고 그 높이도 124m 높아졌다는 건 나로서는 정말 납득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2024년의 시작과 함께 혼슈의 이시카야 현을 중심으로 서쪽 해안 지역에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하여 2백 명 이상이 사망했고, 막대한 물적 피해도 입혔다. 자연은 자연의 길을 갈 따름인데 그것이 때로는 인간에게 커다란 통곡을 안긴다.
운젠 산군이 우리의 설악산만큼 비경을 보여주는 곳은 아닌 듯하나, 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있다면 케이블카도 타고 산행이 어렵지도 않은 듯하니 여러 고봉들에도 직접 올라가 봐야 할 것이다.
일본 운젠 화산 분화를 담은 길지 않은 EBS 동영상이 있어서 주소를 복사해 보았다.
'여행 이야기 > 일본 규슈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규슈, 나 홀로 6박 7일(22) - 사가의 아침(20231030) (0) | 2024.01.20 |
---|---|
일본 규슈, 나 홀로 6박 7일(21) - 시마바라를 거쳐 사가로(20231029) (0) | 2024.01.18 |
일본 규슈, 나 홀로 6박 7일(19) - 운젠 : 온천지옥(20231029) (0) | 2024.01.11 |
일본 규슈, 나 홀로 6박 7일(18) - 운젠 : 오시도리 저수지(20231029) (0) | 2024.01.10 |
일본 규슈, 나 홀로 6박 7일(17) - 나가사키 시를 벗어나 운젠으로(20231029) (1) | 2024.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