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 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어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 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 197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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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양면성. 시는 그 양면성 중에도, 언어가 인간이 이룬 상징체계, 약속이라 결국에는 '언어의 감옥'을 벗어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계속 도전한다. 그 실패한 도전은 그러나 어떤 흔적이나 기미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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