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김광규
가끔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가는
전나무숲 산책길을 가로질러
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간다
혼자서
가족도 없이
걸어잠글 창문이나
초인종 달린 대문은 물론
도대체 살면서 지켜야 할 아무런
집도 없이
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밖으로 걸어나올
다리도 없이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로
민달팽이 한 마리
몸으로 기어간다
눈을 눕힌 채
생각도 없이
느릿느릿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문지. 1998. 59.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라는 비유는 잘 와닿지는 않지만 흥미롭다. 이 민달팽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느림의 미학’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익숙한 것이라서 큰 울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톰 건의 ‘달팽이를 생각하며’에서 드러나는 달팽이의 맹렬함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톰 건 - 달팽이를 생각하며
달팽이가 초록의 밤사이를 헤치며
나아간다, 물기를 머금은 풀은
무겁고, 또 비가 땅의 어두움을
어둡게 한 곳에서, 달팽이가 만든
밝은 길 위로 풀이 만나기 때문이다.
사냥을 할 땐 창백한 뿔을 간신히
꿈틀거리며 욕망의 숲 속에서 움직인다.
어떤 힘이, 거기서 목적에 흠뻑 젖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작용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
달팽이의 노여움은 무엇일까? 나중에
내가 터널 위의 풀잎들을 헤쳐서
혼잡함을 가로지른 가늘고
단속적인 흰 자국들을 보더라도,
그 의도적인 전진으로의
느린 정열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이다
The snail pushes through a green
night, for the grass is heavy
with water and meets over
the bright path he makes, where rain
has darkened the earth's dark. He
moves in a wood of desire,
pale antlers barely stirring
as he hunts. I cannot tell
what power is at work, drenched there
with purpose, knowing nothing.
What is a snail's fury? All
I think is that if later
I parted the blades above
the tunnel and saw the thin
trail of broken white across
litter, I would never have
imagined the slow passion
to that deliberate progress.
패닉 - 달팽이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거라고
아무도 못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모두 어딘가로 차를 달리는 길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해는 높이 떠서 나를 찌르는데 작은 달팽이 한마리가
어느새 다가와 내게 인사하고 노랠 흥얼거렸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거라고
아무도 못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속에서
모두 잊게 모두 잊게 해줄 바다를 건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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