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꽃
김광규
탁상 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맡기고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참으로 오래간만에 피어난 선인장꽃을 바라본다
줄기도 가지도 잎도 없이 솟아오른
희불그레한 목숨
기다리지 않아도 태어나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59번 버스 다섯 대가 지나가도록
약속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자꾸만 막히는 세검정 삼거리
건널목을 다스리는 신호등 앞에
보행자들의 착한 발걸음
늙은 소나무 위에 둥지를 튼 두루미는
다리가 길어서 알을 품기 힘들고
무수한 소절의 음계를 오르내리는 동안
땅속을 파고 가며 볼록한 자국을 남기는
두더쥐의 속도로 이승을 떠나서
평생 즐겨 먹던 무
뿌리를 아래서 올려다보게 되려나
여객기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조그만 단발 비행기 한 대가
까마득히 먼 발 밑을 지나가고 있다
마주치지도 않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길
한가운데 멈추어 선 민달팽이
양쪽에서 질주해오는 자동차들
전조등을 번쩍거리며 달려와
쏜살같이 눈앞을 스쳐가는 지점에
위험하게 벌렁 누워서
선인장꽃을 바라본다
김광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지만]. 문지. 1998. 52.
- 현실과 회상과 상상이 뒤섞인, 그래서 다소 복잡한 이 시는 자연의 리듬과 인위적인 기계 문명의 리듬이 대조되고 있다. 이 시에 대해서 성민엽은 자세하게 분석을 하고 있다(128-130). 성민엽은 이번 시집의 기조를 사회적 시간과 자연적 시간의 대비에서 찾고 있는데, 이 시에서도 그런 면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시 및 감상 > 김광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규 -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0) | 2024.08.23 |
---|---|
김광규 - 듣고 싶은 입 (0) | 2024.08.22 |
김광규 - 느릿느릿 (0) | 2024.08.21 |
김광규 - 지나가버리는 길 (0) | 2024.08.21 |
김광규 - 어딘가 달라졌다 (0) | 2024.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