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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느릿느릿

by 길철현 2024. 8. 21.

느릿느릿

                   김광규

 

가끔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가는

전나무숲 산책길을 가로질러

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간다

혼자서

가족도 없이

걸어잠글 창문이나

초인종 달린 대문은 물론

도대체 살면서 지켜야 할 아무런

집도 없이

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밖으로 걸어나올

다리도 없이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로

민달팽이 한 마리

몸으로 기어간다

눈을 눕힌 채

생각도 없이

느릿느릿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문지. 1998. 59.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라는 비유는 잘 와닿지는 않지만 흥미롭다. 이 민달팽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느림의 미학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익숙한 것이라서 큰 울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톰 건의 달팽이를 생각하며에서 드러나는 달팽이의 맹렬함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톰 건 - 달팽이를 생각하며

달팽이가 초록의 밤사이를 헤치며

나아간다, 물기를 머금은 풀은

무겁고, 또 비가 땅의 어두움을

어둡게 한 곳에서, 달팽이가 만든

밝은 길 위로 풀이 만나기 때문이다.

사냥을 할 땐 창백한 뿔을 간신히

 

꿈틀거리며 욕망의 숲 속에서 움직인다.

어떤 힘이, 거기서 목적에 흠뻑 젖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작용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

달팽이의 노여움은 무엇일까? 나중에

내가 터널 위의 풀잎들을 헤쳐서

 

혼잡함을 가로지른 가늘고

단속적인 흰 자국들을 보더라도,

그 의도적인 전진으로의

느린 정열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이다

 

The snail pushes through a green

night, for the grass is heavy

with water and meets over

the bright path he makes, where rain

has darkened the earth's dark. He

moves in a wood of desire,

 

pale antlers barely stirring

as he hunts. I cannot tell

what power is at work, drenched there

with purpose, knowing nothing.

What is a snail's fury? All

I think is that if later

 

I parted the blades above

the tunnel and saw the thin

trail of broken white across

litter, I would never have

imagined the slow passion

to that deliberate progress.

 

 

패닉 - 달팽이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거라고

아무도 못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모두 어딘가로 차를 달리는 길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해는 높이 떠서 나를 찌르는데 작은 달팽이 한마리가

어느새 다가와 내게 인사하고 노랠 흥얼거렸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거라고

아무도 못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속에서

모두 잊게 모두 잊게 해줄 바다를 건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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