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앞마당
김광규
빛 바랜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들
중년의 퇴직자들과 엄마 잃은 아이들
취직을 해보지도 못한 젊은이들과
실직한 외국인 노동자들도 가끔 뒤섞여
매일 길고긴 하루를 보내는 곳
간이 녹지대와 종로 3가 보도 사이에
리어카 주방을 차려놓고
엘피지 가스로 오뎅을 끓이거나
떡볶이를 굽는 조리대 앞에서
웅기중기 선 채로 허기를 때우는 행인들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밟히지 않고
요리조리 옮겨다니며 음식 부스러기를 줍는 참새들
다리가 빨간 보라색 비둘기들
월남 선생의 동상 어깨와
포장마차 바퀴 밑을 오르내리며
온종일 쓰레기를 주워 먹어 살이 통통히 쪘다
조선 왕조가 잠든 종묘 앞마당에서
찌꺼기처럼 살아가는 우리 식구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48.
* 월남 - 독립운동가 이상재의 호
- 종묘 앞 광장의 모습을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옮기고, 그 현실의 비루함을 '찌꺼기'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화자의 시선은 담담하면서도 애정을 담고 있다. (옹기종기가 아니라 왜 '웅기중기'라고 썼을까? 틈바구니로 넘어가는 행은 단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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