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에서
김광규
일곱 번을 여닫아야 드나드는 숙소에
열쇠를 두고 나온 것은
(흔히 있는 건망증이지만)
물론 나의 잘못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히는 순간
열쇠는 나를 내쫓고
스스로 숙소의 주인이 되었다
낯선 거주자들은 관심 없이 내 곁을 지나갔다
내가 오기 오래전부터 있었을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그대로 있을
값비싼 의류 상점들 예컨대
모피 외투 전문점 포겐슈타인이나
남성 의류 판매점 말로반 등
낯익은 간판들까지 갑자기
환영의 미소를 거두고
적의를 드러냈다
금방 이렇게 달라지다니
지은 지 한 세기 반이 지난 임대 주택
한때 작곡가 주페와 시인 베르펠이 살았다는
합스부르크 시대의 건물 전체가
나를 모른 척했다
여권과 전화번호 수첩까지 안에다 두고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외국의 도시에서
숙소 밖에 갇혀버린 날
내가 묵을 숙소의 출입문 밖에서 나는
혼자 서 있었다
배척당하는 외국인의 동상으로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52-53
- 외국에서 겪은 낭패한 상황을 일기처럼 써나간 시이다. '열쇠는 나를 내쫓고 / 스스로 숙소의 주인이 되었다'와 같은 재치있는 시적 표현이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시의 흐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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