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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문밖에서

by 길철현 2024. 8. 26.

문밖에서             

                김광규

 

일곱 번을 여닫아야 드나드는 숙소에

열쇠를 두고 나온 것은

(흔히 있는 건망증이지만)

물론 나의 잘못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히는 순간

열쇠는 나를 내쫓고

스스로 숙소의 주인이 되었다

낯선 거주자들은 관심 없이 내 곁을 지나갔다

내가 오기 오래전부터 있었을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그대로 있을 

값비싼 의류 상점들 예컨대

모피 외투 전문점 포겐슈타인이나

남성 의류 판매점 말로반 등

낯익은 간판들까지 갑자기

환영의 미소를 거두고

적의를 드러냈다

금방 이렇게 달라지다니

지은 지 한 세기 반이 지난 임대 주택

한때 작곡가 주페와 시인 베르펠이 살았다는

합스부르크 시대의 건물 전체가 

나를 모른 척했다

여권과 전화번호 수첩까지 안에다 두고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외국의 도시에서

숙소 밖에 갇혀버린 날

내가 묵을 숙소의 출입문 밖에서 나는

혼자 서 있었다

배척당하는 외국인의 동상으로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52-53

 

- 외국에서 겪은 낭패한 상황을 일기처럼 써나간 시이다. '열쇠는 나를 내쫓고 / 스스로 숙소의 주인이 되었다'와 같은 재치있는 시적 표현이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시의 흐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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