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의 영토
김광규
앞마당 추녀 앞에 옥잠화와 작약, 대나무와 모과나무, 진달래와 영산홍을 심었다.
꽃나무는 줄기도 없이 뿌리만으로, 갈잎나무는 벌거숭이 맨몸으로 겨울을 나지만, 대나무는 사계질 푸른 잎을 서걱거리며 덩치를 키워서, 이른 봄에는 키가 창문을 가리고, 옆으로 퍼진 가지는 옥잠화와 작약이 있던 자리를 뒤덮어버렸다.
작약의 새싹이 돋아날 무렵, 대나무가 이미 그 위로 퍼져서 햇볕을 가리고 물 주기도 힘들어 올해는 탐스런 함박꽃을 보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신록이 푸르러지는 5월, 하늘이 활짝 갠 날, 틀림없이 누구의 손길이 우리 집 마당을 스쳐간 모양이다.
대나무의 그 무성한 가지와 잎이 무슨 끈으로 동여매기라도 한 듯, 스스로 몸집을 곧추 세워서 작약의 새순이 돋아나는 공간을 비켜주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작약은 무릎 높이까지 자라올라 꽃이 함빡 피고, 키 큰 대나무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방글방글 웃고 있지 않은가.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25.
- 지극히 산문적인 이 시는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그 이면에 있는 화자(시인)의 섬세한 관찰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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