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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by 길철현 2024. 8. 23.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김광규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기침을 하면서, 지나간 생애의 어둔 골목길을 더듬더듬 걸어갔다.

  분명 근처에 있을 전철역을 찾지 못하고, 미국식 고층 건물들이 위압적으로 늘어선 강남대로를 무작정 헤매기도 했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 몇 명이 못 알아들을 말을 지껄이며 지나갔을 뿐, 도대체 행인을 만나지 못했다.

  하기야 지금까지 나를 스쳐간 사람들이 대부분 모르는 이들이었다. 아니면 사투리가 반갑고 음식 냄새가 구수해도, 경계해야 할 동포들이었다. 사람들이 잠들고, 돈만 깨어 있는 밤중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불도 켜지 않은 채, 모서리 창가에 앉아, 밤새도록 구시렁거리는 저 노틀은 누구인가. 어느 집 어르신인가, 늙은 정년 퇴직자인가, 한 겁 많은 서민인가, 아니면 바로 나 자신인가, 그렇다면, 저 아래 어둔 골목길을 헤매고 있는 사람은 또 누구란 말인가.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문지. 1998.107.

 

- 불분명한 대로 이 시는 성민엽이 지적하듯 '반성적 자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오는 사람들이 '생중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 혹은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등장 인물들이 마비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에 반해, '고통스럽더라도 깨어있어려는 정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