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던 때
김광규
조금만 가까워져도 우리는
서로 말을 놓자고 합니다
멈칫거릴 사이도 없이
-- 너는 그 점이 틀렸단 말이야
-- 야 돈 좀 꿔다우
-- 개새끼 뒈지고 싶어
말이 거칠어질수록 우리는
친밀하게 느끼고 마침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경어로 인사를 나누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앞으로만 달려가면서
뒤돌아볼 줄 모른다면
구태여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를 향하여 시속 110km로 내닫는
표범이 훨씬 더 빠릅니다
서먹서먹하게 다가가
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
처음 만나던 때로 우리는
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72-73.
- '관계'를 잘 유지, 조정하는 것이 인생살이에 있어서의 중요한 지혜일 것이다. 모든 관계 중에서 인간 관계가 특히 중요성을 띤다. 얼마나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김광규는 친숙해 지면서 우리가 자칫 자신의 욕망에 함몰되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쉽고 직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가 쉽다고 그 함의마저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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