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얼었다
김광규
1951년 정월 초나흘 멀리서 대포 소리
들려오던 한겨울 꽝꽝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소가 끄는 짐수레와 리어카에 사흘 치
먹을거리와 이불을 싣고 삐거덕거리며
옷 보따리 머리에 이고 등짐 짊어지고
더러는 애기까지 가슴에 안고
수십만 피난민들 걸어서 한강을 건넜다
눈보라도 강추위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
혹독했던 그 겨울 살아남아
반세기가 지난 오늘
눈발 흩날리는 강변도로 자동차로 달려가면서
스무 개로 불어난 한강 다리 양쪽
끝없이 늘어선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 바라보니
지금도 피난 행렬 눈앞에 떠오른다
인해 전술에 쫓기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때보다
이제는 오히려 두려움만 늘었나
다리를 절면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갔던 얼음길
지금은 편안하게 승용차에 실려 가면서
마음은 무겁게 뒤로 처지고
과속 규제 카메라에 잡힐까 봐
움찔움찔 겁을 내는 붉은 후미등 불빛
곳곳에서 앞길을 가로막는다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98-99.
-일사 후퇴 때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 것과 다리 위로 그것도 승용차를 타고 건너는 모습을 대비하고 있다. 가혹했던 과거와 좀스러운 현재가 대비되고 있는데, 김광규의 시에서 거의 언제나 과거가 우위를 점하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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