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몫
김광규
무덤의 봉분을 둥그렇게 쌓아올리자,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죽은 이를 땅속에 파묻고 나니, 새삼 그를 이제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자와 생자는 죽은 날이 아니라, 파묻는 날 헤어지는 것이다.
조객들은 귀로에 하나둘 영구차를 내렸고, 절에 들러 위폐를 안치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가족들만 남았다. 평상시에 비하면 많은 식구들이 모인 셈이지만, 방과 마루와 부엌과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가 그토록 넓을 줄은 몰랐다.
아들은 건넌방 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었고, 딸들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엄마를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간간이 훌쩍거리거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엄마를 잃은 자식들은 저마다 슬픔의 이기주의자가 된 것 같았다. 자기들의 슬픔만 곱씹을 뿐, 아빠의 슬픔은 위로해주려 하지 않았다. 반세기 가까이 함께 살아오며 사남매를 길러낸 아내를 잃은 지아비의 심정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오래된 제비집이 사그라져가고 있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 때문이 아니라도, 이제는 가장 노릇이 끝난 셈이었다. 서둘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혼자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차례였다. 아쉬운 전송을 받으며 먼저 떠난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지만 떠나는 자를 배웅하면서 그 뒷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뒤에 남은 자의 몫이 아닌가. 간직한 뒷모습의 기억을 전해주고 스스로 떠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또한.
김강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120-121.
-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 차이가 없다고 한 워즈워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광규의 이 산문시는 소설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묘사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차이라면 차이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음은 사실 살아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의 성찰이 이 시를 또 소설과 약간 차이 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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