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납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처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霄)야 능소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이야 아니되어도 능소야 능소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째 툭, 툭, 떨어져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
-- 의식의 흐름을 따라 능소화가 피고 지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염천의 매미소리보다 더 들끓고 있다. '시간을 삼킨 구멍'이라는 표현이 특히 눈을 사로잡는데, 약간은 어지러운 가운데 시를 이끌어 나가는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놀랍다. 김광규의 '능소화'를 읽고 문득 이 시가 생각이 나서 옮겨 적어 보았다.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다가오는 김광규의 능소화와 '웃음'과 '울음'과 '징소리'를 품고 있는 김선우의 '능소화'는 강렬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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