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한국현대시

탁구 시 두 편

by 길철현 2024. 9. 18.

탁구공 

                  서효인

 

  내게 무엇을 받을 것인가 바라지 말고, 무엇을 줄 것인가에 대해, 공격과 수비에 대해, 낮과 밤에 대해, 파리와 나비에 대해 생각해 봐,

  사각형의 세계는 늘, 받은 만큼 돌려준다, 독재자의 눈빛을 번득인다, 속임수를 쓴다, 모든 지나감을 아까워한다, 쉽게 탄식한다, 공을 주우러 가는 사내들, 화가 난 양이 된다,

  주고받음의 문제에 대해, 작은 공에서 일어나는 회전에 대해, 사이좋게 나눠 갖는 서브의 권리에 대해, 종교인처럼 말이 많다,

   저 너머의 세계로 당신의 공을 떨어뜨릴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 네트마다 그려진 빨간 해골과 친절한 아침밥에 대해, 협박과 편지에 대해, 망루와 난망에 대해, 녹색의 세계는 반드시

 

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 대전]. 민음사. 2011.

 

 

몽실 탁구장

                         이동훈

 

동네 탁구장에

몽실이를 닮은, 작은 체구에 다리를 조금 저는 아주머니가 있다.

상대의 깎아치기 기술로 넘어온 공은

되깎아 넘기거나 살짝 들어 넘기고

강하고 빠르게 들어오는 공은

힘을 죽여 넘기거나 더 세게 받아칠 줄 아는 동네 고수다.

하루는 권정생 닮은, 빼빼 마른 아저씨가 탁구장에 떴다.

허술해 보여도 라켓 몇 개를 지닌 진객이다. 

몸 좀 풀 수 있냐는 요구에

몽실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공을 받아주는데

조탑동의 인자한 그분과 다르게

이분은 탁구대 양쪽만 집중 공략하는 극단주의자다.

이쪽으로 찌르고 저쪽으로 때리기를 반복하니

불편한 다리로 한두 번 몸을 날려서까지 공을 받아주던

몽실 아주머니가 공 대신 화딱지를 날렸다.

-- 이렇게 몸 풀려면 혼자 푸시고요.

-- 남 욕보이는 걸 취미 삼지 마시라요.

늙으면 곱게 늙으란 말도 보탰는지 어땠는지

사뭇 사나워진 분위기에

권정생 닮은 아저씨는 허, 그것참만 연발한다.

살살 치면 도리어 실례가 아니냐고

몇 마디 중얼거리긴 했지만 낭패스런 표정이 가시지 않는다.

이오덕처럼 바른 말만 하는 관장의 주선으로

다시 라켓을 잡긴 했지만

이점보다 눈에 띄게 위축된 아저씨는 공을 네트에 여러 번 꽂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탁구엔

이쪽저쪽을 삥 뽕 삥 뽕 넘나드는 재미가 있다

몸 쓰며 기분 내는 일이란 

사람사이 간격도 좁히는 것이어서

탁구장 옆 슈퍼에서 

몽실 아주머니와 권정생 아저씨가 우유로 건배를 한다.

아, 이 재미를

오줌주머니 옆에 찬 교회 종지기 권정생은

평생 누리지 못했겠구나.

 

이동훈. [몽실 탁구장]. 학이사. 2021. 26-27.

 

- 탁구 시는 보기 드물다. 내가 아는 것은 이 두 편 뿐이다. 물론 내가 쓴 여러 편의 탁구시가 있긴 하지만. 서효인의 '탁구공'은 난해한 대로, 자유연상 기법으로, 탁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우리의 삶까지 닮아내려 했다면(난망은 難望인지 아니면 難忘인지? 망루와 짝을 이루기 때문에 難望 같기는 하지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녹색의 세계는 이제 청록의 세계로 바뀌었다), 이동훈의 '몽실 탁구장'은 탁구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시 형식으로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시인이 좋아하는 권정생, 이오덕, 몽실 등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것 또한 재미있다. 

 

'한국시 및 감상 > 한국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노해 - 그 한 사람  (0) 2024.09.25
이윤학 - 가을 저녁 빛  (0) 2024.09.19
이동훈 - 몽실 탁구장  (1) 2024.09.18
김선우 - 능소화  (0) 2024.09.03
송진권 - 나싱개꽃  (0) 2024.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