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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정신분석/프로이트 저작들

프로이트 [영15-16] 정신분석입문 1916-17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

by 길철현 2016. 3. 27.



[4독 후](180519)

중요한 부분들을 옮기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나, 현재로서는 2년 전부터 시작해서 1년 전 정도에 끝낸 이 책에 대한 소감만을 간략하게 요약하려 한다. 무의식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인간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하고, 패러다임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바탕 위에서 우리는 또 새롭게 인간과 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 정신분석의 위치는 안정적인가? 인간 세계는 물리적인 충돌 못지 않게 말들의 충돌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말들은 비판 이전에 이해조차도 쉽지 않은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 또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이 말들의 백가쟁명 가운데서 나름대로 그 말들을 이해해보려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떤 계기로 프로이트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처음부터 그의 글에 공감이 갔고, 또 약간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들을 많이 읽었던 듯하다. 예전에는 그가 인간 정신의 비밀에 대한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가까운 친구가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 자신 또한 정신적인 혼란이 심해서 정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안간힘이 아니었나 한다.


한 번의 실패를 겪고,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늦은 나이에 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석사 논문을 쓸 때(그 당시 내 논문의 뼈대를 이루었던 것은 마가릿 말러의 "분리-개별화"라는 전-오이디푸스 단계를 조명한 이론이었는데) [열린책들]에서 나온 한글 번역본으로 프로이트를 많이 읽었고, 이번에 다시 글을 정리하면서 보니까, 논문을 쓰고 난 뒤에도 계속 읽어나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한글 번역본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나 또한 프로이트 이론의 변천이나, 용어의 의미 변화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  '수박 겉핥기 식'의 읽기에 그치고 말았다.


2014년부터 [프로이트 읽기]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영역본을 좀 꼼꼼하게 읽을 기회가 다시 주어졌는데, 제대로 읽은 부분도 있으나, 중간에 또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  프로이트 이론의 난해성도 한몫을 한 것이지만 - 좀 더 체계적으로 소화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제 박사 논문으로 조지프 콘래드를 정신분석적인 견지에서 접근해 보려고 하는데, 아직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20권이 넘는 콘래드의 작품은 이제 거의 다 읽었으므로, 얼마전부터 시 프로이트를 영역본으로 존존히? 읽어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정신분석입문]부터 다시 집어들었다.


원래 생각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을 써서 예전에 써 둔 감상문과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는지 - 이전에 읽은 감상을 먼저 올리게 되었다. [정신분석입문]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인 "1915년에서 1916년, 1916년에서 1917년에 걸친 겨울 학기 동안에" "모든 학부 학생들이 뒤섞인 청중들 앞에서" "빈의 정신 의학 병원 내의 강의실에서 행해"진 것이다.([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입문)]의 서문에서 인용) 조지프 샌들러 등이 쓴 [Freud's Models of the Mind]의 분류에 따라 프로이트 이론의 변천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면, 이 글은 기간도 가장 길고 [꿈의 해석]을 비롯한 중요한 저작들도 가장 많은 2기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정신)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는 지정학적 모델(topographical model)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이드와 자아, 초자아로보는 3기의 구조적 모델(혹은 제2 지정학적 모델)은 아직 도입되지 않은 시기이다. 


뒷부분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모르겠으나, 프로이트가 도입부에서 밝히고 있듯이, 청중들이 정신분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정 아래 강의를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실착(parapraxes)과 꿈을 다룬 앞부분은 지금에 와서 볼 때는 별 어려운 내용이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강의를 구성하고 적절한 예를 동원해 그것을 풀어나가는 능력, 언어구사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가히 전인미답이라고 해도 좋을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홀로 좌충우돌하면서 헤쳐나갔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한 일 년 전쯤인가 술자리에게 이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정신분석 이야기를 꺼내 보았더니, 네 명 중에 한 명 정도만이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다고 했다(그 때 같이 있던 사람들은 50전후의 사람들이고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이었는데도) - 또 아직도 논란과 반박의 중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분석입문]을 읽고

  

 (덧붙이는 말 - 거의 30년 전, 그러니까 87년도에 카투사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프로이트의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당시 내 자신의 지식이나 인내력의 부족, 그 다음 우리나라 번역의 문제 등으로 사상 서적을 읽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는데 이 책은  원어인 독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중역)한 것 - 삼성 출판사의 세계 사상 전집 중 한 권으로 그 당시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던 김성태가 번역 - 임에도, 읽으면서 번역이 그래도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던 때라 책을 읽는 것이 수월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예전의 독서 수첩을 찾아보니 첫 번째로 완독을 하고 난 다음 '독서의 새로운 장'이라고 적어둔 것으로도 그 힘겨움이 묻어난다. 

  아래 글은 두 번째로 이 책을 읽고 난 뒤 쓴 독후감이다. 89년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에 고향인 대구의 두류 도서관에서 이 책과 씨름하던 때 - 독서 수첩을 보니 정확하게 20일 걸렸다 - 가 아련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앞에서 그냥 포기하고 싶은 마음, 혹은 달아나고 싶은 마음과, 참고 끝까지 읽어나가야겠다는 결의 사이의 갈등. 그 갈등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것인데, 어찌보면 많은 책들을 내 것으로 최소한이나마 소화하지 못하고 그냥 마구 삼킨 것은 아닌가 하는 - 그래봐야 몇 권 되지도 않지만 - 후회가 따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일단은 내 자신의 '정신적인 혼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의 일환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직전인 86년도에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친한 친구를 좀 더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읽기 전에 쓴 글] (당시 표기를 그대로 따름)

  '정신 분석'이 현대 '정신 의학'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의 정도를 파악하고 있진 못 하지만 프로이드의 학설은 기존적인 우리의 의식을 완전히 뒤엎는 센세이셔날 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식이 가져다주는 오류인가? 인간 생활의 많은 부분이 '성'이란 바탕 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민석(가명)이의 경우'와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는지 알 순 없지만, 현대를 지배하는 의식의 한 부류를 파헤쳐보는 것도 의의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정신 분석 입문]을 읽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어떤 일을 추구해 나가 그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고 성공을 거두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타당성 여부는 제쳐둘 때) 이 프로이드 박사가 한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1873년 그가 17살 나던 해 비인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뒤로 1939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는 정열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그 의지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1915년 비인 대학에서의 강의를 토대로, 일반인들이 정신 분석을 이해할 수 있도록 1917년에 발간한 <정신 분석 입문.은 그의 연구의 집적이며 전(前) 세기 다아윈의 <종의 기원>이 불러 일으켰던 반향만큼 큰 영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것이다.

  18, 19세기 서구 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오게 하였지만, 전쟁과 기아의 공포는 인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인류의 의지에 반(反)하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것들이 (인류의) 역사상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 계속 될 전망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원인이 외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면 일단 우리는 이러한 것들의 내재를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긍정이다.

  프로이드의 이 <정신 분석 입문>은 그 때 까지 무시되고 간과되어 왔던 무의식의 영역을 파헤침으로써 인간이 흔히 생각해 온 그런 모습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영역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물 표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은 물 밑에 있는 빙산에 비교에 보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이 때 까지 사람들은 물위의 빙산 만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드의 학설을 양면성의 긍정이라고 보는 것은 나 자신의 도식화요 단순화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의 두 개의 얼굴과 프로이드의 학설이 가진 관련에 대한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인간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는 가능한가? 여기에 답하기에 앞서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자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석학 프로이드의 이 책을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1989)

 

(덧붙이는 말 - 공책에 적어놓은 이 글을 옮기면서 다시 읽어보니까 어린 나의 모습이 치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풋풋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정신분석과 나와의 인연은 이 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책을 마치고 4일 후에 프로이트의 실제적인 대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꿈의 해석]을 집어들어 "1달 8일 간의 대장정"을 거쳐 끝을 냈다.)  


[덧붙임] (오늘 오래 전에 컴퓨터에 정리해 둔 글들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깨닫게 되어 상당히 놀랐다. 2006년과 2007년 석사 논문을 다시 준비하면서, 나는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한글 번역으로 많이 읽었는데, 내 기억에는 이 [정신분석입문]을 다시 읽은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제임스 스트래치가 번역한 이 책의 영역본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을 읽고 난 뒤에 쓴 감상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도 읽은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그 책을 살펴보니 군데군데 중요 표시와 짤막한 글들이 남아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인가? 어쨌거나, 현재(2016년 10월 18일) 나는 이 책을 네 번째로 읽고 있는 셈이다.) 그 때의 감상을 옮겨 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시간과 끈기와 정서적 안정과의 싸움이다. 처음에 큰 부담 없이 시작된 이 책도, 그 두터운 분량으로 인해, 그리고, 중간부터는 어려움으로 인해,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20년 전에 이 책을 한글로 두 번 읽었었다. 이번에는 영어로 읽었는데, 생각보다 뒷부분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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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생각의 기본 골격은 우리의 행동이 많은 부분 무의식의 추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고, 또 우리 자신의 무의식을 잘 살핌으로서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우리가 무심결에 하는 실수나, 꿈에서 잘 드러나며, 또 정신 분석을 통해서, 우리의 좌절된 욕망이나, 억압된 부분 등도 살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리비도, 그리고, 그러한 것이 신경증으로 연결되고 하는 뒷부분은 다른 책을 읽으면서, 좀더 정립해 나가야 할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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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의 짧음, 시간이나 집중력의 문제, 이런 것들이 많이 노정되는 요즈음이다. 그렇더라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