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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유서

by 길철현 2024. 11. 24.

 사람들이 나를 살인자라 부른다.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생을 범했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임형사는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난 신문을 들고 와서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일일이 읽어주기까지 했다.

 이 모두는 새빨간 거짓이다.

 배후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음모이다.

 그날 나는 친구 성기와 학교 앞 정림에서 술을 마시고 열두 시가 넘어서야 자취집에 들어갔다. 동생은 그때 이미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그런데, 친구 성기는 그날 나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구마저도 나를 배반한다.

 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음모가 집요하게 내 목을 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하나뿐인 혈육을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온몸을 난도질할 수 있으며, 결혼을 한 달 앞둔 동생을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음모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만큼 거대하다.

 그 거대함만큼이나 잔인하다.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감금하고는 죄를 인정하라며 엉터리 증거를 마구 날조한다. 나의 무죄를 입증해 줄 유일한 사람, 내 동생은 영혼마저 찢기운 채 가 버렸다. 사람들은 지금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지금도 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음모는 순결한 영혼을 유린하고, 무고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몰고 있다.

 내 피만이 나의 무죄를 입증하리라.

 내 피만이 이 음모의 심장을 적시리라.

 

                                        (19980722)

                                        (199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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