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일기장으로 더듬어보는 이십 년 전의 나
제출용 일기장은
욕망이 언제나 무릎을 꿇고
착한 소년, 말 잘 듣는 소년이 되겠습니다
앵무새보다 더 열심히 되뇌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옳은 말과 길들여진 말 사이
그러나 나는 없었다
여동생이 대신 써 준 부분도
훌륭히 날짜를 메우고 있었다
분장처럼 덧씌운 가면 거추장스러워
진짜 일기장에다 나를 풀어놓는다
욕망은 거기서도 무릎 아래로 숨죽이고
그림이나 시, 낙서로
가끔씩 고개를 빼꼼 내밀 뿐이지만
분장과 가면은 많이 지워져 있었다
마음의 일기는 또 상처의 기록이고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안티푸라민이고
복수할 수 없는 복수의 기록이었다
드물게는 용서할 수 없는 용서의 제스처였다
낡은 일기장 속의 나는 이젠 없다
이십 년의 두께 밑 어딘가에서
가끔씩 나를 벼락처럼 눈뜨게 한다
(98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