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점을 먹으러 집을 나섰더니 '전국 가을비'라는 일기예보는 이미 실행을 마친 뒤라 도로에는 비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참새떼가 잔가지를 흔들며 앉아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좀 더 먼 수풀 속으로 화다닥 자리를 옮긴다. 짹짹거리는 작고 귀여운 놈들이라는 생각 속으로 저 놈(년)들도 지렁이 등의 작은 벌레나, 파리, 모기, 잠자리 - 정말 이런 것들을 먹나 - 등의 곤충에게는 무시무시한 포식자라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먹고 먹힌다는 것.
몇 년전 나는 인생에 거듭 좌절감을 느끼던 가운데, 남한의 거의 최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산을 오르다가 그다지 몸집이 크지 않은 개구리가 자신의 몸 길이보다도 긴, 길이가 거의 이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굵은 왕지렁이를 통째로 삼키려 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보게되었다. 막무가내로 왕지렁이를 자신의 내장 속으로 삼키려는 개구리와,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온몸으로 버둥거리는 지렁이의 조용하지만 치열하고 처절한 자신들의 전 존재를 건 싸움이었다. 자신의 몸뚱아리의 반 이상이 개구리의 입 안으로 들어간 상황에서도 지렁이는 계속 버둥거리고 있었고, 내가 옆으로 다가가도 다른 곳으로 달아날 엄두도 잘 내지 못하고 개구리는 자신이 삼킨 지렁이를 굴복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치열한 싸움은 거의 십여 분 이상을 지속되다가 결국 개구리가 수풀 속으로 사라져 그 결말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개구리의 승리로 끝이 났을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지나친 과욕으로 개구리도 큰 탈이 생겼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그런 의도도 없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몇 가지 생각들이 뒤를 잇는다. 이러한 자연계의 먹이사슬의 관계를 에밀리 브론테는 [나비]라는 불어로 쓴 짧은 작문 연습용 글에서 아주 비관적인 관점에서 표명했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같이 미쳤다. 개울 위에서 해롱거리는 저 파리들을 보아라. 제비와 물고기가 매순간 이들의 수를 줄여버린다. (하지만 ) 이들도 그 다음 순간에는 공중이나 물속에 있는 다른 포식자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재미를 위해 또 필요에 의해 이 살해자들을 죽일 것이다. ) 자연은 불가해한 문제이다. 그것은 파괴의 원칙 위에 존재한다. 그 하나하나가 다른 것을 죽음으로 이끄는 지칠 줄 모르는 도구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이다. . . .
La nature est un problème inexplicable, elle existe sur un principe de destruction; il faut que tout être soit l'instrument infatigable de mort aux autres, ou qu'il cesse de vivre lui-même. . . . (Brontë & Brontë The Belgian Essays 177)
하지만 그녀보다 후대의 영국 남성 작가들은 다윈이나, 니체의 소위 “힘의 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생존 경쟁,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맹렬함'이나 '치열함'을 오히려 경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매(hawk) 등 동물을 주제로 한 테드 휴즈의 시는 자칫 이러한 과도한 힘의 추구가 파시즘 등의 전체주의와 연결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데, 톰 건의 「달팽이를 생각하며」("Considering the Snail")는 우리가 흔히 느리고 연약한 동물로 생각하는 달팽이의 사냥하는 모습에서 강렬한 본능과 의지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달팽이가 초록의 밤사이를 헤치며
나아간다, 물기를 머금은 풀은
무겁고, 또 비가 땅의 어두움을
어둡게 한 곳에서, 달팽이가 만든
밝은 길 위로 풀이 만나기 때문이다.
사냥을 할 땐 창백한 뿔을 간신히
꿈틀거리며 욕망의 숲 속에서 움직인다.
어떤 힘이, 거기서 목적에 흠뻑 젖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작용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
달팽이의 노여움은 무엇일까? 나중에
내가 터널 위의 풀잎들을 헤쳐서
혼잡함을 가로지른 가늘고
단속적인 흰 자국들을 보더라도,
그 의도적인 전진으로의
느린 정열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이다
The snail pushes through a green
night, for the grass is heavy
with water and meets over
the bright path he makes, where rain
has darkened the earth's dark. He
moves in a wood of desire,
pale antlers barely stirring
as he hunts. I cannot tell
what power is at work, drenched there
with purpose, knowing nothing.
What is a snail's fury? All
I think is that if later
I parted the blades above
the tunnel and saw the thin
trail of broken white across
litter, I would never have
imagined the slow passion
to that deliberate progress.
달팽이가 물을 머금은 수풀을 헤치고 힘겹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거기에 작용하는 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에 어떤 맹렬함이 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을 그는 “노여움”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생명체의 에너지가 강렬하게 발현되는 현상을 인간의 화의 감정에 빗대어서 표현한 것이지, 특정 대상에 대한 화는 아닌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자기 표절이란 이런 것이리라. 에밀리 브론테에 대한 부분과 톰 건 부분은 석사논문과 대학원 발제문을 엮은 것이니까. 나 스스로 흥미로운 점은 에밀리 브론테와 테드 휴즈, 톰 건 등을 연결해 볼 생각이 났다는 점이다.)
자연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에밀리 브론테적인 비관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고, 앞서 말한 대로 테드 휴즈의 [홰에 앉은 매](Hawk Roosting)처럼 포식자의 입장에서는 전능감과 함께 자칫 파시즘으로 빠질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몇 자 적어보려고 했는데, 글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퍼져나간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홰에 앉은 매]에 대해서 쓴 부분도 옮겨본다. 글이 엄청 길어지고 만다.
그런데, 휴즈의 「홰에 앉은 매」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시는 생명체 혹은 자연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찬양하는 것으로 비칠 수가 있으며, 그것은 다시 파시즘이나 나치즘 등의 전체주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시는 앞에서 다룬 시,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도 강인한 내면적 에너지로 유유자적하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의 「황조롱이」("The Windhover")를 떠올리게 하는 「빗속의 매」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결국 죽음으로 자연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그 시의 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을 보인다.
더 나아가, 이 시를 둘러싼 논란은 이 시가 흥미롭게도 매를 화자로 하여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휴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로 인해서도 더욱 가중된다.
내 발은 거친 나무껍질을 움켜쥐고 있다.
내 발과 내 깃털 하나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창조의 전부가 들었다.
이제 나는 삼라만상을 내 발에 잡는다.
혹은 날아올라, 그 모두를 천천히 회전시킨다--
그 모두는 나의 것이기에 나는 마음 내키는 곳에서 죽인다.
내 몸에는 궤변은 없다.
내 습속은 머리를 떼어내는 것이다--
죽음의 분배.
내 비행의 길 하나는
살아 있는 것들의 뼈를 지나는 직접적인 것이니까.
내 권리는 누구도 논쟁하지 못한다.
태양은 내 뒤에 있다.
내가 시작한 이래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내 눈이 아무런 변화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만물을 이런 상태로 유지하려 한다.
My feet are locked upon the rough bark.
It took the whole of Creation
To produce my foot, my each feather:
Now I hold Creation in my foot
Or fly up, and revolve it all slowly --
I kill where I please because it is all mine.
There is no sophistry in my body:
My manners are tearing off heads --
The allotment of death.
For the one path of my flight is direct
Through the bones of the living.
No arguments assert my right:
The sun is behind me.
Nothing has changed since I began.
My eyes has permitted no change.
I am going to keep things like this.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과대망상적인 유아론에 빠져 있는 매를 시인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매는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아주 단순한 논리와 문장으로 자신이 이 세상의 지배자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매의 자기중심성은 24행으로 된 이 시에서 “나”와 관련된 단어가 스물한 번이나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그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에 맞서 휴즈는 이 시가 “자연”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 작품 중에서 자주 폭력으로 회자되는 시는 홰에 앉은 매, 이 졸린 매가 숲에 앉아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에 관한 것이지요. 이 새는 파시스트라고 비난을 받는데요. [. . .] 끔찍한 전체주의적인 독재자, 대량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의 상징이라고. 실제로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이 매 가운데에서 자연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자연이지요.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연이 더 이상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겠지요.
The poem of mine usually cited for violence is the one about the Hawk Roosting, this drowsy hawk sitting in a wood and talking to itself. That bird is accused of being a fascist . . . the symbol of some horrible totalitarian genocidal dictator. Actually what I had in mind was that in this hawk Nature is thinking. Simply Nature. It's not so simple maybe because Nature is no longer so simple. (Faas 8)
브래드쇼(Graham Bradshaw)는 휴즈의 이러한 해명을 받아들여 이 시에서 “가차 없고 무도덕적인 자연의 비전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자연에서의 의지라는 개념, 그리고 흄(David Hume)의 ‘맹목적 자연이라는 관념’과 매우 밀접하다”(53)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포식자로서의 매의 습성이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체의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서라면 수긍이 가도, 그것이 자연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어 자연이 인간적인 관점과는 상관없이 맹목적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쉽게 동의하기가 힘들다. 휴즈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매와 자연을 쉽사리 동일시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 시의 파괴적인 매가 명백히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나가겠다는 것--그것이 현상태의 유지라고 할지라도--에는 분명 시인의 세계관이 개입하고 있고, 그것은 논란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인용한 휴즈의 말 중에서 “자연이 더 이상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자연관에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변화에 섬세하게 반응을 하는 것이 시인의 책무이지 이전의 관념을--비록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그대로 밀고 나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이거(Keith Sagar)는 “매의 입을 통해 자연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 . .] 전략은 실효를 거둘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문화와 전통의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자연이라는 것 또한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매의 비전을 정신 착란에 빠진 인간, 그러니까 카뉴트(Canute)나, 리처드(Richard) III세, 히틀러(Hitler)의 비전 이외의 것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292). 그의 이러한 지적은 휴즈의 이 시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적절하게 지적한 면이 없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이 부분까지 옮겨 놓고 보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조차도 헛갈리는데 - 인간의 뇌가 움직이는 방향은 도대체 - 위의 글을 쓸 당시를 돌이켜본다면, 문명화에 따라 인간의 공격성이나 맹렬성이 좀 더 창조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병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주로 나타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나약한 형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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