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어떤 사건을 맡았을 때 흔히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성역없이 수사하겠다'라는 것이다. 이 점을 약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성역에 뭔가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 이 문제는 '철저한 인식론적 회의'와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의심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것. 거기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더해도 '인식하는 주체'는 더 이상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훌륭했고, 답도 그럴 듯했다.
그러나, 그가 의심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심을 가능케 했던 '언어' 자체였다. 반항아이자 철학계의 대표적인 삐딱선이라고 할 수 있는 니체가 이 점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나'라는 주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언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야기해서 '인식'이라는 말이 정당성을 지니고 확실성을 지니는 것은 그 말을 익혀서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의 '약속'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지만 니체의 반박도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언어 현상에 대한 의심 자체도 일단은 언어의 규칙의 수용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원초적인 침묵'이나 새뮤얼 베켓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보여주었던, 럭키의 '의미가 해체된 말'뿐이리라.
라캉 이론에 나오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정을 어느 정도 종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 부분은 앞으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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