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소설

박상연, DMZ, 민음사, 97년 (2000년 10월 2일)

by 길철현 2016. 12. 1.

- 박상연, DMZ, 민음사, 97(2000102)


그저께 극장에서 [공동경비구역JSA]를 보고, 내친 김에 소설마저 읽었다. 최근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통일이 곧 이루어질 듯한 기대에 부풀기도 하지만, 지난 오십 여년 간의 분단은 전쟁과, 반목과, 극한적 대치로 일관되어 왔기 때문에, 분단 문제는 남한과 북한 모두가 안고 있는 제일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문학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임에 틀림없다. 오래 전에 이호철이 쓴 <판문점>이라는 짧은 소설에서, 남한의 기자가 북한 기자와 차 안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남한과 북한 사람은 이어질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그 소설은 그러한 금기를 깨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가 보안법에 의해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과 말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이 악법에 따르면 북한 사람과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리라. 탁구 선수인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이념과 국가를 넘어 핑퐁러브를 이루어 내었듯이, 남한의 남자 혹은 여자가 북한의 여자 혹은 남자와 사랑을 해서 결혼하는 그런 꿈을 잠시 꾸어본다. 이념의 이 딱딱한 장벽을 사랑이 좀 말랑말랑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박상연은 젊은 신인 임에도 불구하고, 큰 주제를 힘차게 써내려 갔다. 우찬제의 말대로 소설이 더 이상 서사에 기대기 힘든 시대임에도, 서사를 확실하게 밀고 나간 것이다. 소재나 인물의 설정은 이 작품이 안고 있는 비극성을 부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으나 신인으로서의 몇 가지 약점은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드러난다. 내가 특히 이 작품의 약점이라고 느낀 것은 서술의 문제였다. 우찬제도 비슷한 지적을 했지만, 김수혁이 베르사미, 즉 이강민에게 사건을 진술하는 방식을 요약 등의 방법을 차용하여, 김수혁이라는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나온 점 등은 약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보 전달 방식이나 구성상의 문제, 그리고 곳곳에서 눈에 띄는 감상적 태도 등은 이 신인에게 좀더 큰 수고로움을 요청하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소설의 앞부분에서 주인공의 애매한 신분(가족 관계, 국적 등)을 서둘러 밝히느라 필요 이상의 정보를 빨리 노출하고 있다든지, 피의자인 김수혁의 진술 부분을 그를 초점자로 삼아 길게 일괄적으로 처리한 것이나 아버지의 진군 일기 부분의 직접 제시 등은 소설 구성을 단조롭게 하는 대목이다. 주인공이 이방인으로서 객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가도 감상성에 떨어지는 부분이나 아버지에 대한 반목이나 이해가 구체적인 실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판문점 경비병들이 소설처럼 휴전선 이북에서 수시로 회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개연성이 문제될 수도 있다. (우찬제, 257)

 

분단 문제의 핵심을 동물에게 적용되는 조작적 조건 형성(offerent conditioning)’에서 찾고 있는 작가는 남북한 사람 모두가 동물과 똑같이 이데올로기의 세뇌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그러한 세뇌가 궁극적으로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는 생각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든 하지않든 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후, 분단의 현실의 정곡을 짚은 작품은 그리 없었는데, 이 작품은 90년대라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 정곡을 짚어 넘어가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난 이제 통일 따위엔 관심이 없다. 천만 이산 가족은 우리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세대에게나 절실한 문제이고 그들은 이제 곧 사라지며, 그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누가 무엇 때문에 통일, 그 자체를 원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사회 과학적인 견지에서 통일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일차적 모순이 계급 모순이니, 민족 모순이니 하는 해묵은 논쟁에도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은 통일이 아니라 분단에 있다. 통일이 아니라 분단 상황의 해소다. 합쳐야 한다는 민족적인 견지의 당위 따위는 나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갈라져 있음으로써 오는 폐해는 이 글의 주인공에게 그랬듯이 나를 미치게 했고 또한 지치게 했다. (작가의 말, 258)

 

신인 특유의 힘과 대담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어쨌든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보려 했다는 점에서 일단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앞으로 나오는 작품에서는 소설 미학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베르사미, 이강민은 과연 어떤 언어로 이 작품을 썼을까? 불어가 아닐까? 아버지의 일기는 너무나 친절하다. 너무 현대적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그 때의 일 그대로 적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나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차분히 사건을 적을 수 있는 시간은 극한의 상황에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동생을 죽인 일을 그토록 이성적으로 적어낼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아니면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김수혁의 경우도 이 점은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 사건은 때로 감추고 왜곡시킴으로써 오히려 더 예리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 수 있다. 이 점에서 박상연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작가가 너무 극적인 상황의 부각에 힘을 기울인 탓이리라. 비극에서는 그러한 정황 속에서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맞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비극을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복잡다단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