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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김욱동,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 문지 [2001년]

by 길철현 2016. 12. 5.


*김욱동,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 문지



<촌평>
"비평서를 겸한 이론서, 이론서를 겸한 비평서"를 써보겠다는 저자의 기획 아래 시도된 이 책은, 문학 이론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대체로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고, [광장]에 대한 실제 비평서로서는 여러 군데 흥미로운 지적이 있었지만, 저자의 말대로 '한 작품을 일곱 가지 비평 방법으로 다루'는 데에서 오는 모순이 따르고, 거기다 작품 해석을 경직되게 하고 있는 부분도 눈에 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기획 자체가 참신한 것이고, 저자가 거기에 기울인 노력 또한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비평에 대한 공부에 채찍질을 하는 책이기도 하다.)



*1960년에 [새벽]지에 처음 발표될 때에만 하더라도 갈매기가 상징하는 인물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두 여성 강윤애와 은혜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 작품을 고쳐쓰는 동안 그는 강윤애 대신에 은혜가 임신한 태아에 무게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현은 이 작품의 주제가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사랑의 문제로 그 비중이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과연 사랑의 중요성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인지는 좀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개작을 거듭하면서 작가가 사랑의 중요성을 한 주제로 부각시키려고 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제가 달라지게 된 데에는 작가가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떤 경험과 관련성이 있는 듯하다. 김병익도 지적한 바 있지만, 가족과 떨어져 사 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미국에 사는 동안 사랑이 작가의 삶을 규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41-2)
*최인훈의 문학관은 기본적으로 러시아 형식주의의 그것과 아주 비슷한 데가 많다. 어떤 다른 한국 작가보다도 그는 문학 예술의 매체인 언어에 대하여 자의식을 느끼고 있는 작가이다. 여러 글에서 그는 문학이란 언어를 독특하게 쓰는 예술이라고 여러 번 말해왔다. (144)
*엘리엇은 <종교와 문학>이라는 글에서 "어느 작품이 문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문학적 기준을 따라 결정할 수 있지만, 문학의 '위대성'은 오직 문학적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145)
*프랑스의 카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의 속성을 바로 끊임없이 옮겨다닌다는 데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호모 비아토르'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셀의 이론은 인간의 속성을 지식(호모 사피엔스)에서 찾으려고 한 생물학자 칼 폰 린네나, 노동(호모 파베르)에서 찾으려고 한 칼 마르크스나, 또는 유희(호모 루덴스)에서 찾으려고 한 요한 호이징하의 이론과는 크게 다르다. 마르셀은 다른 이론가들과는 달리 좀더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속성이나 본질을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한낱 나그네처럼 끊임없이 이 세상을 떠도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움직임이 곧 삶이며 움직임을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48)
*[광장]에서 지리적*심리적 여정을 통하여 이명준이 그토록 얻고자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통찰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하여 부단히 헤맨다.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이명준이 여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추구하는 물음 가운데 하나이다. (150)
*이명준의 태도는 실존주의적 세계관과 아주 비슷한 데가 있다. 실존주의자들은 소외나 고립이라고 하는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개인의 자아나 정체성을 지키려고 무척 애쓰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에 있어 자아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곧 죽음을 맞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명준이나 실존주의자들이나 한결같이 개인과 사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늘 의식하고 있다. (163)
*. . .[광장]의 독자들은 주로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지식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젊은 지식인층 독자들이 이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소설이 아마 분단 현실과 남한과 북한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었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239)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난 1979년에도 [광장]은 다시 한번 곤욕을 치른다. 10*26 사건에 이어 신군부가 정치 권력을 잡은 다음 계엄사령부측은 더 이상 이 소설을 찍지 못하게 하였다.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작품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작가의 문학 전집을 간행한 문학과지성사측은 이 작품이 북한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혹독히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가까스로 군부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240)
*융의 이론 가운데서도 '원형'의 개념이 심리 비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놀랍게도 세계 전역에 걸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신화나 이야기에 대하여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동일한 신화나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 인류의 과거 기억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는 집단 무의식 속에 과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탓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신화이면서도 비슷한 모티프나 패턴 또는 주제를 지닌다. 융은 이러한 패턴이나 모티프 또는 주제를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원형은 상속받은 관념의 패턴이나 철학적 사고보다는 오히려 자극이 주어질 때에 비슷한 식으로 반응하는 성향, 그러니까 '상속받은 심리적 행동 양식'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의 활동 영역에 속한다. 원형은 역사적 인간보다 더 역사가 오래다고 일컫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270)
*신화 비평은 문학 작품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신화적 패턴, 즉 원형을 구현한다는 전제에 뿌리를 둔다. 가장 실험적인 작가들조차 옛날 이야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 경험의 연속성에 눈을 돌린다. 신화 비평은 문학에 나타나는 원형적인 패턴을 찾아내고 이러한 패턴이 어떻게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 그리고 효과에 이바지하는가를 밝혀내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한마디로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인간성을 탐구하려고 한다. 신화 비평을 흔히 '원형 비평'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73)
*[광장]의 이명준도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양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북한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갈등에서 그는 방황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니까 그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오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쳐진 제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공동 사회의 강요에 따라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음을 택한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에는 사회의 탓으로 돌릴 만한 부분도 적지 않다. (290)
*프랑스의 구조주의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형태의 사회 생활은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의식적이고 사회화된 사고의 차원에서, 무의식적 정신 활동을 규제하는 보편적 법칙을 보여주는 행동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짓는다. (302)
*서사 이론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 주네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투아르'와 '레시' 그리고 '나라시옹'을 구분한다. 여기에서 이스투아르란. . .연대기적이고 논리적 순서에 따른 작품의 줄거리나 스토리를 가리킨다. . . .
한편 레시란 이스투아르가 여러 기법에 따라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플롯이나 내러티브 텍스트 그 자체를 가리[킨다]. . . .그리고 우리말로 '서사화'라고 옮길 수 있는 나라시옹은 서술 행위나 서술 방법을 가리킨다. (313-4)
*주네트는 문학 작품의 모든 이야기가 문장,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동사나 술부를 확장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 서사 이론의 근거를 둔다. 그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율리시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다"라는 문장을 이야기로 늘어놓은 작품이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이 작가가 되다"라는 문장을 길게 늘어놓은 작품이다. (324)
*3인칭 제한 시점을 사용하는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광장]은 형식에서는 3인칭 소설이면서 실제로는 1인칭 시점으로 된 소설의 효과를 지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주인공이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소설을 읽는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주인공 이명준의 의식 속에 깊이 들어앉아 마치 어항 속 물고기를 바라보듯 그의 내면 세계를 빤히 들여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345)
*. . . .인간의 문화 현상에서 이항 대립을 찾아내려고 하는 태도는 구조주의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항 대립이 으레 어느 한쪽에 더 큰 가치나 특권을 부여하는 반면 나머지 한쪽을 억압한다는 데에 있다. 바꾸어 말해서 이항 대립의 두 쪽은 대등한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직적 관계를 지니며, 수직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폭력적인 특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수학의 분수식에서 분자에 해당하는 첫 번째 짝이 늘 적자(嫡子)의 대접을 받아온 반면, 분모에 해당하는 두 번째 짝은 언제나 서자(庶子)처럼 천대와 괄시를 받아왔다. 의미는 항상 이항 대립에서만 생겨난다고 보는 구조주의자들은 바로 이 대립에 기초하여 이론을 만들어낼고 하였다. 구조주의적 작업은 모든 현상에서 이러한 이항 대립을 찾아내는 일과 다름없다. 그러나 해체주의자들을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항 대립의 '폭력적 계급 조직'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계급 조직은 아무리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보일지라도 결국은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 관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는 텍스트에서 이항 대립을 찾는 일에 만족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이항 대립의 그릇된 논리를 밝혀내는 일을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3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