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이상문학상 작품집(28회), 문학사상사
(그 동안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어왔을까? 그리고 그 책들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탁구의 시간’이었던 지난 이삼 년 간에서, 다시 문학의 공간으로 들어와 있다. 가을 물빛으로 가라앉은 나의 사랑이 이번에는 흔들리는 일 없이(그러려면 충돌을 피해야 한다) 지속되어 나가길 바란다. 책의 구입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대신에 집에 있는 책을 한 권, 한 권 꼼꼼히 읽고, 정리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는 것은 쉬워도, 읽는 것은 어렵다. 또 책 한 권을 소화하는 문제에 가서는 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 책을 나는 멀리 강릉까지 가서 샀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그 인기나 인지도 때문이겠지만, 또 내 취향에도 잘 맞아, 87년도 작품집부터 읽기 시작한 이래로 2000년도 작품집까지 다 읽었었다. 87년 이전에 나온 작품집들은 헌 책방에 가서 한 권씩 사모아 1회 때부터 24회까지의 작품집을 모두 읽은 셈이다. 그러다가, 2001년도와 2002년도의 작품집에서는 대상수상작(신경숙의 <부석사>와,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만을 간신히 읽더니만, 2003년도와 2004년도의 작품집은 아예 구입마저 하지 않았었다. 내 온 정신이 탁구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5월, 나는 다시 한 번 내 인생을 문학과 철학을 하는 삶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때, 정확히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적기 힘들다. 탁구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칠 수 있는가? 하는 건 알겠는데, 그 한계가 너무도 명백하게 보였다. 탁구는 내 나이와 여러 여건들을 고려해볼 때, 아마추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아마추어적인 것에 내 인생을 걸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내 꿈은 그보다 컸다). 2000년 12월 말, 은영이를 떠나보내고, 또 영광이 형에게 내 시들이 혹평을 당하고 하는 과정에서, 한 마디로 나는 야코가 팍 죽어버리고 말았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접고 탁구에 몰두했다. 탁구는 나에게 내가 애쓴 만큼의 보답을 돌려주었다. 거기에서 다시 내 꺾여진 날개짓을 새롭게 해나갈 힘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더 이상 글쓰기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순수한 추구의 문제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차피 실패한 인생에서 문학(철학)의 위안마저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 정도였으리라(이건 2개월하고도 이십여 일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뚜렷해 진 것이지만). 그러나, 탁구를 떠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운동에 중독 된 몸이 갑작스럽게 운동을 중단하자, 우울과 무기력이 몰려왔다. 만화 가게에서 고행석의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축내고, 사랑할, 혹은 사랑해 줄 여인도 없는 내 삶이 견딜 수 없는 쓸쓸함으로 다가오고. 그 극점에서 나는 또다시 차를 몰고 긴 여행을 떠났었다. (이 때 여행 경로는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포천(안개)-운천(크로바장)-삼부연폭포-와수리가기 전에 지방 도로로 들어감--장* 댐(새도로)-사창리--화천--지방도로를 따라 양구까지(공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평화의 댐’을 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바닥에서 댐의 꼭대기까지 이백여 미터에 이르던 것. 그리고, 공사중이라 울퉁불퉁하던 길. 건설 현장의 직원들이 군인들보다 더 절도 있게 경례를 하던 것. 해산터널?)--잘 닦아놓은 4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한계령 대신 미시령을 넘어간 것. 어디서 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상용의 ‘폭소열차’를 들으면서. 미시령의 절경, 울산바위 뒷모습의 웅장함. 자연의 그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여행의 끝이 강릉이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강릉을 들를 때면 찾곤 했던 헌책방 ‘교동 서점’(이번에 갔을 때는 이름도 ‘인터넷 서점’으로 바뀌었고, 장소도 예전 있던 곳에서 이층으로 옮겨 간 상태였다)에 들렀다가, 새책으로 나와 있는 2003, 2004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나는 수첩에다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적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원주에서 일박을 더 했는데, 다음 날 아침 피랍되었던 김선일 씨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어지러운 가운데, 내 결심은, 탁구를 떠나보내고(그 아픔이 너무도 아프긴 했지만) 이제 남은 생을 걸고 철학-문학을 하자는 것이었다.
글을 안 쓴 지가 너무도 오래 되어서, 펜이 무디어 질대로 무디어 지고, 전환기의 어지러움에 내 토대가 흔들리기는 하지만, 하루하루, 내가 목표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김훈의 <화장>을 읽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
김훈의 <화장>은 상당한 글이다. 삶을 들여다보는 힘이, 실험은 부족하지만, 보이는 작품이다.
사설이 길어지긴 했지만, 한 작품, 한 작품 간단한 인상, 느낌, 촌평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1. 김훈 : 화장
김훈이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를 이류작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나는 (김신이라는 작가와 이름이 비슷해서 일까? 아니면 [자전거 여행] 따위의 산문이나 적어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그러한 도약이 잘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근거가 모호한 편견은 그의 이 작품을 읽는 순간, 내팽개쳐진 사기그릇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이 작품집 뒤편에 실린 박철화의 <작가론>에 나오는 내용 때문에 기억이 촉발된 것이겠지만, 대학 시절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 기행>을 재미있게 읽었던 듯한 느낌이 흐릿하게 나는 듯도 하다.
강릉 교동의 어느 한 골목의(바로 옆에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차안에서 나는 이 작품을 다 읽었다. 이 작품은 당시 내 허약하고 가라앉은 정신에다, 등대처럼 반짝이며 다가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훈의 <화장>은 상당한 글이다. 삶을 들여다보는 힘이, 실험은 부족하지만, 보이는 작품이다.
지금 생각해 볼 때, 이 김훈의 글에서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아마도 그 문체의 힘 내지는(그의 문장의 아름다움을 나는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을 읽으며 더욱 가슴에 와닿게 느꼈다), 처절한 극기주의가 아니었던가 한다. 죽음에 처한 아내의 몸과, 회사의 후배 여직원의 몸의 대비(‘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라는 문장이 주는 시적 울림), 그리고, 한 인간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발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사. 그의 글에는 오랜 시간 이 고통스러운 삶을 눈감지 않고 보아낸 자의 지혜가 엿보인다.
이 작품이 지닌 상징성이나, 심사위원들의 상찬, 그런 것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김훈의 작품을 다시 주의 깊게 읽고 난 연후에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2. 문순태 :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
문순태의 입담은 알아줄 만 하다. 그리고, 소설을 엮어가는 솜씨 또한 한 경지에 올랐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전년에 이 특별상을 수상한 전상국의 <플라나리아>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잘 빚은 항아리들’이지만, 그래서, 보기에도 좋고, 향취도 좋지만, 이전에 봐온 ‘항아리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새것과, 옛것의 대비, 옛것에의 잊을 수 없는 향수. (이인성의 작품이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실패할 지라도 새롭게 시도해 보겠다는 그 정신이 아닐까?)
3. 구효서 : 밤이 지나다
구효서의 작품으로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2001년도 이상문학상 추천 우수작인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뿐이다. 집을 떠난 뒤로 수십 년 간 연락이 없는 아버지와의 전화를 통한 상상의 대화, 몽상의 대화. 이번 작품은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의 장면에서 차용된 부분과, 혜성이나 그 밖의 천체가 주는 우리 존재의 시원에 대한 추구성, 그 두 가지 요소를 잘 조합시켜 놓았다. 우리 존재 근원으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의도, 또는 하루하루의 각박한 현실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태도 등이 주목할 만하다.
4. 김승희 :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
김승희는 시인으로서 보다 소설가로서 더 주목을 받을 모양이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낼지 주목되지만, 요즈음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불륜’의 문제나, ‘삶의 강퍅함,’(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감내해야 하는), 경제적인 문제, 이런 것들을 폰팅 여성들의 대화체로 풀어나가고 있는 독특한 소설. 약간은 신파조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5. 전성태 : 존재의 숲
이 소설은 현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모습을 교묘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이 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거기서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6. 고은주 : 칵테일 슈가
“이거, 모양이 느낌표를 닮았지? 느낌표의 달콤함만 즐겨봐. 심각한 물음표는 만들지 말고.” (194)라는 말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농축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륜의 문제를 가볍게 다루고(모두 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니, 불륜은 불륜이 아니다?), 불륜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자기에게까지 돌아오고, 마지막의 반전. 소설이 소설이라는 걸 보여주는 깔끔한 단편인데,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글쎄?
7. 하성란 : 그림자 아이
재미있고, 소재의 특이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 상실’이라는 증상은 실제로 어떤 것인가? 기억을 잃어버린 다른 것은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리고 싶은 상처, 그러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 상처. 이 작품도 어떻게 보면, S-I 계열의 작품이다.
8. 정미경 :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사회 문제화 되고 있는 ‘기러기 아빠’ 이야기를 다룬 작품. 하지만, 작품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외된 존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름의 끝이 이토록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네.
헤어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없었네. (278)
이 구절이 주제로 요약될 수 있을 터인데(그렇다면 이 작품도 S-I다), 주인공이 너무 쉽게 죽는다는 느낌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볼 것)
9. 박민규 ;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청년 실업의 문제, 현실의 강퍅함을 독특한 문체와, 잊혀진 너구리 게임의 상징, 혹은 너구리가 주는 인상에 기대어 전개해 나간 작품. 흥미롭다. 가볍다. 새로운 글쓰기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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