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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051204)

by 길철현 2016. 12. 6.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051204)


독서일기를 살펴보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나]를 읽은 것은 벌써 거의 일 년 전의 일이다. 그 때, 별 생각 없이 서가에서 빼냈다가 그 강한 흡인력에 빨려 들어 거의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그리고, 그 작품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두 권이나 구입했지만, 웬일인지 나의 손은 이 책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내 삶이 무기력 앞에서 무너지려 할 때, 이 책을 빼어들었다. 그리고는 또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그렇다, 박완서의 첫 번째 장점은 독자를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장점은 지속적이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간다면, 쉽사리 물리지 않을까? 대부분의 소설은, 결국에는 소설은 소설에 지나지 않아하고 손을 털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 않는가?) 비록 지속적으로 읽기에는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끔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의 작품을 들면, 그녀는 아주 익숙한 인간적인 목소리로 사람살이의 모습을 크고 작은 들려준다.

이 소설은, [그 많던 싱아]가 그녀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의 자전적인 모습을 담은 이야기라면, 일사 후퇴 이후 전쟁이 끝날 무렵 그녀의 결혼까지의 생활상을 또렷한 기억력에 의존하여 사실적으로 보여주려 한 작품이다.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무엇보다 목숨의 부지가 최우선 순위였던 텅 빈 서울에서, 올케와 함께 빈집털이를 하여서 부족한 양식을 구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리고 중반부에는 대학 문턱을 겨우 밟았을 뿐이지만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아니 젊은 사람이 그만큼 드물었던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북을 위해서도 일해야 했고, 남을 위해서도 일해야 했던 모습이 드러난다(그녀는 결국에는 공산주의의 이념의 참모습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크게보면 그 이념의 비인간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특히 방소 예술단의 위문 공연을 보고 난 뒤에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남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서 박완서를 절망과 분노에 떨게 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너무나 치졸한 노래와 춤이 위대한 예술의 탈을 쓰고 있고, 자신의 영혼은 그것에 거짓으로나마 감동해야만 하는 상황의 야만성이다. 다른 하나는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사이비 예술을 강요하는 상황의 야만성이다.’). 이후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처녀였던 그녀는 피엑스에 근무하면서 지섭이라는 청년과 첫사랑을 나누고, 그 다음 남편이 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상이 이 작품의 대체적인 큰 틀이다.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그려냈기 때문에 육이오 당시 서울의 모습이 생생이 살아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밖에 다리에 총을 맞고 결국에는 죽고 마는 오빠의 모습, 북으로 거짓 피난을 가면서 겪어야 했던 이야기들은 우리 삶이 어떤 면에서는 소설보다도 더욱 극적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이오는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지만, 이제는 벌써 오십 년도 더 된 일이라, 자꾸만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역사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박완서는 자신의 체험을 소설이라는 장르에 실어 그 시대를 독자로 하여금 간접체험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 이것은 아마도 과거이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고, 역사이고, 진실일 것인데, 그 산을 망각하지 말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