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408 김광규 - 시론 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 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어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 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 1979. 13. .. 2024. 2. 1. 김광규 - 봄노래 봄노래 김광규 눈이 녹으며 산과 들 깊은 생각에 잠긴다 희미한 추억을 더듬는 들판 잡초들은 제 키를 되찾고 기억력이 좋은 미류나무 가자마다 꼭 같은 자리에 조심스레 나뭇잎들 돋아난다 진달래는 지난날 생각하며 얼굴 붉히고 산골짝에 푸익는 암내 시냇물은 싱싱한 욕정 흘리고 피임한 여자들은 예쁜 죽음의 아이를 낳는다 이윽고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 산과 들 조금씩 자라고 남자들은 새로운 아파트를 지으며 고향에서 그만큼 멀어진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 1979. 38 ------ 계절의 순환을 노래한 시인데, 자연의 흐름과 인간 사회의 괴리가 제시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달곰에게"에 실린 유종호 해설 참조할 것. 2024. 2. 1. 김광규 -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지. 1979. 1970년대 말에 등장한 김광규는 우리 현대시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그가 번역한 브레히트의 시들을 떠올리게도 하는 그의 시의 특징은 산문성, 명징성, 일상성 정도의 말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쉬워 보이는 그의 시가 진부함으로 떨어지지 않고, 시를 읽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은 왜소하고 비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압축해서 제시하는 데에서 오는 정직한 지적 통제력 때문일 것이다. 다시 그의 시를 읽어나가면서, 그가 어떻게 시를 쓰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실감해 나가려 한다. 2024. 1. 30. 김광규 - 반달곰에게 반달곰에게 김광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창조도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에 원인이 있었고 뒤이어 결과가 따랐다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은 다시 결과를 낳았다 오래된 원인과 결과가 새로운 원인과 결과로 뒤바뀌며 마침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는 오늘의 원인이고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며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고 내일은 오늘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원인과 결과를 끊으려는 미련한 곰아 새로운 원인을 오래된 결과라 부르고 오래된 결과를 새로운 원인이라 부르며 원인 없는 결과를 만들려 하지 마라 때로는 죽음도 하나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문지. 1983(1986). 45. ----- 인과론을 시로 푼 듯해 보이는.. 2024. 1. 30.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