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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어둠의 심연

백낙청 -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려 : 콘래드의 [어둠의 속]을 중심으로. (콘래드-[암흑의 핵심])

by 길철현 2017. 12. 11.


한 때 백낙청의 글을 좀 집중적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도 읽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내 논문과 관련된 것이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기본적으로 학부 학생들을 위한 강연이라 그 내용이 난해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지적들이 몇 가지 나왔고, 강연 제목이 시사하다시피 어떻게 하면 좀 더 주체적으로 인문학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강연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강연의 핵심 중 하나는 아체베의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이 '작품을 너무 주관적으로 읽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체베의 강연과 논문이 그 뒤의 비평에 불러온 파장을 생각해 볼 때(사실 아체베의 그 글은 콘래드 비평의 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다소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과 이어지는 생각은 주체적 읽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섬세하게 읽어 내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백낙청은 한 축에서는 리비스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테리 이글턴의 최근의 책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서도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백낙청은 이 작품에서 '콘래드가 비록 동시대인들의 인종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작품에서 제국주의 또는 인종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보고, '여성문제만 봐도 콘래드가 성차별문제, 또 계급문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문제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제레미 호손의 논문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면서 이 작품을 옹호하는 쪽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콘래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다소 유보가 따르는데, 그것은 말로와 콘래드의 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 콘래드가 어느 부분에서 아이러니를 사용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진지하게 노정하고 있는 지를 어떻게 변별하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더욱 더 생각을 벼려야 한다.


 



[인용]

(32) 근대 세계체제의 중심부에서 이 세계를 이끌어오고 있는 실세를 가진 그런 문화권(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의 문학을 우리가 파악하지 않고는 현대세계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그리고 충분한 인문적 교양을 갖췄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는 것.


- 역사적으로 보면 서양의 고전들이 갖는 이른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을 식민통치를 하는 사람들이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의 도구로 이용.


(33) 이이제이적 태도 : 우리가 서양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고 해서 서양문학을 무조건 배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내부에서 자신의 행태를 비판하고 단죄하는 그런 요소를 끌어다 활용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수고를 덜면서 서구비판의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

(41) 이중 액자 소설

(46) 밀림의 힘이, 또는 여기 아프리카 대륙의 '어둠'의 힘이 커츠를 - 그러니까 커츠는 자기가 그것을 정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둠의 힘이 커츠를 정복했던 거지요.

(49) 아체베: 사람들이 자기가 미국 대학에서 아프리카 문화를 가르친다고 하면 아프리카에 무슨 문화가 있었는가 하는 식으로 나오곤 하는데, 바로 아프리카에 대한 그런 인종주의적 편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콘래드의 [어둠의 속]이다. ---

(50) 제 생각은 콘래드가 비록 동시대인들의 인종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작품에서 제국주의 또는 인종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백낙청의 논의의 핵심)

(51) 헌트 호킨즈, 제러미 호손(4판) 콘래드의 성차별주의 내지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에 맞서, 말로가 피력하는 여성관은 유럽 여성에만 해당하며 그나마 노동계급의 유럽 여성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 그리고 콘래드의 인종주의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음을 강조. 두 사람 모두 아체베가 너무 단순화해서 읽었다는 점을 꽤 자상하게 논함.

(53) 일단 벨기에의 식민주의 비판. 하지만 커츠를 두고 '모든 유럽이 그를 만들었다'라는 말이나, 프랑스 군함이 대포를 쏘는 장면 등을 볼 때 벨기에의 식민통치에 대한 영국 식민통치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려고 했다는 해석은 좀 억지.

(55) 영국 식민지주의(로드 짐), 미국의 신식민지주의(노스트로모), 벨기에의 약탈적이고 저급한 식민지주의, 이런 것들을 다 콘래드 나름으로는 비판했다.

(56) 제러미 호손: 제국주의적 행각과, 세상사를 모르고 곱게 살면서 자기들의 이상을 앞세워 그런 남자들을 존경하고 지원하는 여성들의 이상주의가 사실은 결부되어 있음. (이 사람 글 꼭 읽을 것.

- 아프리카 여자에 대한 묘사는, 사실 커츠의 약혼녀인 벨기에 여성은 아름답고 고상하게 그려놨지만은 죽음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데 비해서 그 야만인 여자는 그야말로 생명이 넘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

- 여성들만 잘 들여다봐도 콘래드가 성차별문제, 또 계급문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문제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8) 싸이드 : 이 작품을 제국주의적인 편견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식은 오히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가 있다.

(60) 리비스가 지적하는 수식어의 남용이라든가 하는 그런 스타일상의 결함하고 제국주의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데 있어서 콘래드가 지녔던 한계하고 이런 게 다 얽혀 있음. 그런 것을 작품을 세밀히 읽으면서 가려내야 함.

- 주체적 읽기, 강조.


- 말로와 콘래드의 거리의 문제

(86) 말로의 얘기 내부에 이미 아이러니가 많기 때문에 그걸 정확히 이해하면서 작가와의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움. 아이러니 중에는 명백하게 반대 얘기를 하기 위해 구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지 저건지 분명하게 재단하기 싫으니까 모호하게 남기기 위해서 구사하는 아이러니도 있음. 하여간 그런 여러 가지 거리두기가 있음.

(87) 인간 영혼의 '말할 수 없는' 깊이의 신비에 대해서 자꾸 이런 강조를 콘래드가 하는 것이 그 목적은 그 신비에 대한 독자들의 인상을 더 크게 하려는 것이지만 사실은 인상을 흐려주는 결과가 된다.

(88) 제국주의의 어둠이라는 것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니만큼 그것을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극복하려는 의지, 아프리카가 아니면 유럽에서라도 그걸 넘어서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다는 신념 같은 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

(이 작품의 '어둠'이 제국주의적인 것과 관련이 되지만 거기에 한정되고 마는 것일까?

(102) [콘래드를 아체베는] 형편없는 인종주의자라고 단죄하고 나왔는데,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서양 사람들이 볼 때, 심지어 같은 비서구권의 아시아인들이 보더라도, 아프리카인으로서 화난다고 해서 작품을 너무 주관적으로 읽은 게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서구인들의 자기중심적 읽기뿐 아니라 비서구인으로서의 주관적 반응에서도 한 걸음 더 나가야 함.

(106-07) [제목에 대한 이야기]

-요는 그 '어둠의 속'의 핵심은 뭐냐, '암흑의 핵심'의 핵심은 뭐냐, 그게 아프리카 자체가 지닌 어떤 마성 같은 것이냐. 그렇게 본다면 그건 인종적인 편견에 흐른 것인데, 이 작품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법한 대목들이 더러 나옴. 그러나 말로라는 인물이 그런 마성이나 마력 같은 걸 느꼈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말로가 그런 걸 느꼈다고 해서 콘래드가 꼭 아프리카 자체가 어둠의 세계고 콩고 내륙지대가 어둠의 속이다, 암흑의 핵심이라, 이렇게 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여지도 있음. 런던이나 브뤼셀에서도 그 어둠이 감지가 되고 있고, 커츠는 몰락했지만 말로는 그렇게 되지 않음. 자기 깜냥의 문제.

커츠가 그렇게 된 게 사실은 커츠가 허황된 이상주의와 제국주의의 자기변론, 스스로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내면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 (커츠가 텅 빈 인간이라는 것은 누구의 말이었던가?

It echoed loudly within him because he was hollow at the core. . . .  말로의 해석이다.


[더 읽을 것]

Jeremy Hawthorn: The Women of 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