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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서북 능선을 타다 (4) - 1990년 7월의 설악산 기행을 적은 글

by 길철현 2016. 6. 16.

[7월 12일 : 넷째 날]


비는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내렸다. 불안한 내 마음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꿈과 생시를 오락가락했다. 비 뿌리는 소리와 나무를 핥고 어디론가 달아나는 바람소리만이 가득. 이리 저리 뒤척이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정상적이라면 어제 아침에 변을 봤어야 하는데, 오늘까지 참았으니 속이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마땅한 장소 - 특히 비가 왔기 때문에 -를 찾기가 힘들었다. 중청 산장엔 화장실이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던가? 우산을 들고 나섰지만 옆으로 들이닥치는 비 때문에 바지가 흠뻑 젖었다. 화장실 근처에 여기저기 똥 무더기가 보였다. '왜 화장실을 두고 저기서 변을 보았을까?' 하는 나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예전에 화장실이던 곳에 굵은 못이 박혀 있었다. 폐쇄된 것이다. 일단 참을 수밖에.


텐트와 프라이를 친 사이에는 비를 피해 날아든 날벌레들이 까맣게 붙어있었다. 저것들이 모두 모기였다면. '비가 이렇게 쏟아지고 있으니, 계곡물도 엄청 불어났을 거야. 빨리 내려가야 하는데. 정말 강신경들이야 꿈쩍도 않고 자네.' 나는 혼자서 군시렁군시렁거리기도 하고, 옆에 있는 주환이 형을 깨우려고도 하였다. 그런 나의 모습이 그슬렸던지, "비 그치면 일어나도록 하고 좀 더 자자"하고 태룡이 형이 한 마디 했다. '밤새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는데, 언제 비가 그친단 말야.' 나는 침낭을 개키고 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는 멎었다. (7시 반) 8시쯤 되자 비도 그치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빨리 내려가야 오늘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나는 딴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혼자 샘터로 물을 뜨러 갔다. 그리고, 나에겐 또 다른 임무가 하나 있었다. 쌀을 빌리는 일이었다. 형들은 쌀을 어떻게 빌리느냐면서 라면을 끓여먹자고 하였으나, 나는 이 일은 자신이 있어서 내 스스로 나섰던 것이다. 그건 내가 쌀을 빌려준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목표는 대학생들, 단체로 왔으니 분명 누군가는 여유분이 있겠지. 사실 쌀이 모자라는 경우야 별로 없지 않은가? 쌀을 안치고 있는 한 대학생 앞으로 가 약간은 머뭇거리면서 또 좀 조용한 목소리로 (왜 인간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비굴해질까?) "실례합니다. 저 쌀이 좀 모자라서 그러는대요. 쌀 조금만 빌릴 수 없을까요?" "저 우리도 쌀이...."라고 쌀을 안치던 학생이 대답하는데, 텐트 안에서 "**야, 쌀 좀 드려라, 우리는 남으니까."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거기 조금이라도 오래 서 있으면 쌀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양 부리나케 우리 텐트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 자고 있던 태룡이 형이 부시시 일어나며 아침 준비를 하는 우리들을 보면서 "좀 미안하네"하고 말했다. "쌀은 어디서 났노?"라는 질문에, 내가 얻어 왔다고 성헌이 형이 말하자, 태룡이 형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은근히 기분이 우쭐해졌다. 하지만 아침을 지으면서 나는 또 한 번 쫑크를 당했다. 산행의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석유 버너 하나 켤 줄 모른다는 것 등의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국을 끓이면서는 코펠의 손잡이를 떼어놓지 않아 잡을 수 없게 해놓아 그것도 욕을 먹었다. 주환이 형은 "어쩜 이렇게 잘 날 수가 있을까?"하고 티박을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한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들의 놀림과 장난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들의 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망각하지 마라. 아니, 네가 그런 마음을 유지한다면 그들이 너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없다'라는 울림이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같은 배를 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텐트를 걷고 출발할 무렵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많던 대학생들도 우리보다 한발 앞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제부턴 내가 한 번 왔던 길이라 해서 내가 선둘르 잡았다. 라면도 다 먹어치웠고, 밧데리는 버렸고, 남은 음식도 버렸고, 무거운 손전등 하나는 주인인 성헌이 형에게 돌려주었고, 배낭은 훨씬 가벼웠다. 이제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내려가야 한다.


희운각에서 소청까지 올라오는 길은 가파른 길 중의 하나, 그러나 내려가는 길이야 가파르다 해서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앞서 가던 내가 바위에서 바위로 뛰는 순간 뭔가 '뚝'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맨 주환이 형의 고물 배낭이 기어코 끊어지고 만 것이다. 이제까지 무사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도 그닥 가까운 것은 아닌데. 성헌이 형이 배낭의 다른 끈과 묶어 주어서 메고 갈 만은 했지만 거북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 석철이와 이곳을 오를 때 (분명) 위험한 곳을 한 곳 지났다는데 대한 집착이 길을 잘못 가게 하였다. 앞서 가던(끈을 메느라 시간을 허비한 까닭에 꼴지로 쳐졌다) 성헌이 형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렀더니, 성헌이 형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희운각에서 소청에 이르는 길에 험난한 곳은 없었다. 석철이와 내가 길을 잘못 갔던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는 등산객에게 "수고하십니다"라고 다정스레 말을 부치지만, 그 속엔 '고생 좀 할거다'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음을 부인할 순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다시 그러한 고생을 마치고 내려가는 우리에 다한 자랑스러움이 숨어 있기도 하지만. 등산 안내엔 중청에서 희운각까지 1시간 15분 걸린다고 했는데, 요번에는 내 등산 배낭이 끊어져 좀 시간을 끌었음에도 1시간이 채 안 걸린 11시 30분에 희운각에 도착했다. 양폭까지는 개울다운 개울이 없는 걸로 기억하고 있던 나는, 희운각 근처에 왔을 때 들리던 세찬 물소리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희운각 옆에 흐르던 실개천이 엄청나게 물이 불어 제법 개울을 이룬 것이었다. 약 이십 분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우리들은 이틀간 못한 세면을 했다.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등산화를 벗고 발도 씻을까 하다가 번거로워서 그만 두었다.


(8월 6일)

12시에 희운각을 출발하여 양폭까지는 쉬지 않고 걸었다. 선두를 잡은 나는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주의를 하면서(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별로 없는 쉬운 길이었지만) 내려가는데, 뒤따라 오던 태룡이 형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태룡이 형이 부르는 곳으로 가보았더니, 주환이 형이 경치를 보기 위해 잠시 능선 쪽으로 빠진 것을 그쪽으로 가는 줄 알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의 운이 좋은 것인지 오늘도 출발한 뒤로는 비가 별로 오지 않았다. 계곡에 물이 불어 윗부분만 나온 돌을 밟고 건너느라 위태위태했다. 급기야는 한 곳에서 태룡이 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에 빠졌다. 앞서 가던 태룡이 형이 가볍게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기에, 그 다음에 나도 따라 가볍게 건너 뛰다가 물에 한 발이 빠져 버렸고. 주환이 형은 처음부터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그 모양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태룡이 형과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외국인 한 명이 등에 짐을 가득 지고 판초를 입고 헉헉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산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수고하십니다"라는 말을 주고 받는 것이 관례인데, 이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하면 적당할까 생각하다가 'Good job'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에게 직접 이 말을 하지는 않고 가볍게 눈웃음만 주고 받았을 뿐이지만. 미군들과 이 년 동안 같이 생활을 했다는 게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희운각에서 산길을 벗어나 계곡과 만나는 곳부터는 절경의 연속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 살아있음으로 해서 이런 아름다운 절경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행복의 하나인가? 이 자연의 아름다움은 조금치의 더러움도 추잡함도 끼어들 틈이 없는 순수한 미 그 자체인 것이다. 천불동 계곡을 처음 구경한 태룡이 형은 연달아 찬사를 발했다. "설악산이 이 정도로 아름다운데, 금강산은 어떻겠노?"라고 누가 말하자, 주환이 형은 "1900년도 초까지는 금강산이 더 아름답다고 했지만, 그 뒤부터는 설악산이 더 낫다고 안 알려졌나. 그전까지는 설악산이 워낙 험해서 올라올 수 없는 곳이 많았거든." 딴은 그렇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러한 철제 난간이 없었다면 이 계곡은 웬만한 등산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올라오기 힘든 곳이었을 테니까. 또, 예전에 그러한 등산 장비가 있었다고 보기도 힘든 것 아닌가.





양폭에서 주환이 형과 또 의견 충돌을 빚었다. "한 시간 정도만 걸어가면(이건 좀 과장이다. 비선대까진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비선대고 거기 가면 음식을 사먹을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 비싼 돈 주고 라면 사먹으려고 그래요"하고 막아 세웠으나 배가 고프면 걸을 수 없다는 고래 힘줄보다 열 배쯤 질길 것 같은 주환이 형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양폭엔 학교에서 MT온 학생들이랑, 현대의 연수원생들로 해서 겨우 자기자리 차지해 있을 만큼 바글거렸다. 매점에 가니 라면 하나에 500원씩 받고 있었다. 콧수염에다 턱수염을 한 자나 기른 중늙은이 하나가 500원이면 싸죠 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주환이 형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나는 조금 전에 물에 빠져 완전히 젖어 버린 스타킹과 양말을 빨았다. 라면을 먹고 있으려니까 한 떼의 대학생들이 몰려와 (그들도 대구에서 올라온 것 같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자리도 좀 더 좁힐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인간의 마음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그냥 감상하지 않고 추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유는 뭘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저 쓰레기, 내 옆에 고여 썩어가는 물, 이것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에게 대체로 짜증나게 하는 것이었다.


주환이 형의 말이 속초에서 서울까지 가는 막차가 6시까지는 있다고 했다. 6시까지라면 시간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한 가지 계산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 도착해서 집에 돌아오는 문제였다. 서울까지 오는 것만 생각했지, 서울에 도착해서 하숙집까지 오는 문제에 대해선 별로 고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간밤에 내린 많은 비는 흘를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흘러내렸다. 바위 틈 사이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물은 폭포처럼 떨어져 내렸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현대의 도시 문명은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까지도 위험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귀면암은 우리가 오르막을 올라야 할 유일한 코스였다. 암만 봐도 귀신의 얼굴 같은 구석은 없는데, 다만 (무의미한) 바위들의 무의미한 집합 같은데 왜 "귀면암"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면암 고개에도 물건을 내다놓고 파는(음료수 따위)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서울가는 막차의 시간을 묻는 등산객이 한 명 있었을 뿐.


예전에 비선대에는 비선대의 아름다움을 읊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시가 한 편 있었는데 언제 없어졌는지 몰라도 요번에 가니까 없었다. 비선대와 와선대에 대해서 나는 정말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따. 그러니까, 이 생각은 고등 학교 이학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학 여행을 온 나는 비선대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높은 봉우리를 비선대(덧붙임. 이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이다), 그 옆의 맨드리한(매끄러운)  절벽을 와선대라고 생각해 버렸던 것이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잘못된 생각은, 와선대가 비선대와 멀리 떨어져 표시되어 있다는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번에 비선대란 개울 옆에 놓여있는 편편하고 큰 바위(방구)를 가리키며, 그 높다란 봉우리는 미륵봉(덧붙임. 장군봉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예전부터 그 논리적 모순을 의심쩍게 생각해 오던 것이, 요번에 사 본 "설악산" 안내 책자를 통해 내 생각의 오류를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선대에 도착한 시간은 세 시 반, 막차 시간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고, 우리가 더 걸어야 할 거리도 한 40분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비선대 식당에서 막걸리 한 잔 하고 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야 겠다'고 맹세한 이후로 맥주 반 잔 정도 이상은 마신 적이 없었지만, 힘든 산행 뒤에 술 한 잔 안 한다는 것은, 비록 나의 맹세가 중요하다고 해도, 원가 빠진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들어 나도 한 잔을 받았다. 형들은 받은 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고, 나도 삼분의 일 가량 마셨다. 가슴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 막걸리는 정말로 맛이 좋았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힘들긴 했지만 뭔가를 해냈다는 보람이 휩싼 탓일 것이다. 요번 여행에서의 문제점, 힘들었던 점, 성헌이 형은 "그래도 요번에는 무릎이 탈이 안 나서 다행이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힘든 노역 뒤의 휴식이란 이런 것일까? 연수 나온 현대의 근무자들이 식당을 점유하고, "위하여"를 외치고 있었고, 그들 시중을 드느라 조그만 체구의 종업원 아가씬 여기저기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경치가 술맛을 돋군 것일까? 형들은 30분만에 막걸리 네 병을 비웠다(나는 고작 한 잔을 마셨을 뿐이다).


비선대를 지나면서부터 길은 넓고 평탄해졌다. 식당들도 눈에 띄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안내책자를 하나 살까 하다가 그냥 지났다가 다시 돌아가 샀다. 책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일까? 딴 것은 몰라도 책은 사두고 싶었다. 프롬의 말에 의하면 나는 "소유"(Possesion)를 추구하는 형태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빨리 마신 술이라 그런지 주환이 형은 약간 취한 것 같았다. 기분이 좋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시외버스보다는 고속버스가 빠를 거라는 예상에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이라고 하기엔 너무 규모가 작아 정류장이라고 부르는 게 차라리 나아 보였다. 우리가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여섯 시 십오 분. 앞차는 다섯 시 오십 분에 떠나버렸고, 여섯 시 오십 분에 출발하는 막차만이 남아 있었다.


요기라도 하고 떠나기 위해 한식과 중식을 동시에 파는 곳에 들어가 중국 음식을 먹었다.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6시 40분에 차가 떠나니 빨리 주세요"라고 태룡이 형이 말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6시 40분에 떠나는 차가 어디 있어요. 6시 50분이면 50분이지." 정류장 옆 음식점 주인에게 차 시간을 속이려고  한 것은 태룡이 형의 실수라 해야겠다.


설악동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오는 동안 내 코를 자극했던 비릿한 냄새는 바닷내음이었다. 탁 트인 바다에서 날아오는 그 비릿한 내음.


(8월 8일)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른 것은 6시 40분. 나는 태룡이 형과 같이 앉고, 주환이 형과 성헌이 형이 한 자리에 앉았다. 좌석표는 끝까지 다 팔린 모양으로 45번까지 찼다.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경향이라, 나는 태룡이 형에게 양보했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서울까지 다섯 시간 좀 넘게 걸린다 했다.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서 차 안은 후덥지근했다. 이 운전사는 전기 절약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는지 약 10분간 에어컨을 켰다가는 30-40분 정도 꺼두곤 했기 때문에, 서울까지 오는 동안 더워서 혼이 났다. 참다 못한 내가 차 중앙에 있는 덮개를 열고 난 뒤부터는 거기를 통해서 바람이 들어와 견딜 수 있었다.


차는 여섯 시 50분 정각에 출발했다. 꽤 힘들었던 여행이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 가슴엔 '커다란 확신'이 하나 박혔다. 살아 보아라. 삶이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 이상 삶은 네가 향유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다. 저 넓은 바다를, 그렇다, 저 바다를 보아라. "형, 저 수평선을 가만히 보세요, 왜 저게 둥근지 아세요." "그거야, 지구가 둥그니까 둥근 것 아니냐?" "그게 아니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내가 서있는 지점으로부터 저쪽 수평선에 있는 점들까지의 거리는 일정하단 말이에요. 그 일정한 점들의 연결선은 원이 아니겠어요." "니 말도 일리가 있다만, 그것도 지구가 둥근 다음에 이야기가 아닐까. 지구가 둥글지 않다면 니 말이 맞을까?" 태룡이 형의 이야기는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 한 가지를 덧붙여 생각해 보게 하였다. 만약 지구가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직사각형(정육면제)이었다면, 저 수평선이 둥글게 보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시외버스가 한계령을 넘어가는 반면 고속 버스는 대관령을 넘는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기로 되어 있었다. 낙산사를 지날 때 얼핏 해수관음상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시간을 때울 겸 산 스포츠 신문과 한겨레 신문엔 삼일만에 보든 대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강릉을 지난 버스가 대관령을 넘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한 끝없이 긴 고개, 이 고개, 처음 오는 곳인데도 낯이 익다. 이 안개하며. 아니, 이 곳은 지난 봄 수학 여행(덧붙임. 성신여대 학생들과 함께 과에서 단체로 일종의 졸업 여행을 했었다) 때 지난 곳이잖아. 반대편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잘 몰라봤던 것일까?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고개 중간에서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정말 나는 이런 시골에서 살고 싶어요." "글 쓰려면 이런 조용한 곳에 있는 것도 괜찮지. 그러나, 그게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되지. 인간의 삶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거든. 어디를 간다해도 사람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 시골에서 산다해도 분명 동리 사람들하고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것이잖아. 그렇지 않고 시골을 하나의 도피처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 아니겠어."


'형 말이 옳아요. 그러나 만일 내가 인간을 싫어한다면. 인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면.' 나는 이 말을 할 순 없었다. 그건 어쩌면 패배자의 발언이니까.


형과 나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충 이런 것이었다.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인간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인간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이성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측면. 이성적인 측면이 인간을 콘트롤 할 때는 인간은 별 문제 없이 지내는 것 같애. 그런데, 때때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때가 있거든, 그라면 문제가 생기는 거지."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죠.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 과연 가능할까요?"


용평 휴게소에서 차는 멈춰 섰다. 우리들은 매점 안으로 달려들어가 아이스크림과 마실 것을 샀다. 어떤 아주머니께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했는데, 그 아주머니는 사진을 찍어본 경험이 없으신 모양인지, 우리의 요구와는 관계엇이, 우리가 막 웃고 있는데,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 있는데 찍어버렸다. 그렇지만 인화된 사진 중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차 안이 워낙 더웠던 관계로(이 때까지도 나는 차 중앙의 덮개를 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두 병을 더 사가지고 왔다. 아이스크림을 먼저 먹고, 음료수는 두 사람에 한 병씩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태룡이 형이 아이스크림을 먹자마자 잠이 들어서 나는 사이다를 다 마셔버렸는데 이게 탈이었다. 한참 자던 태룡이 형이 더위를 견딜 수 없었는지 눈을 뜨더니만 음료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은 게 있을 리 있나? 밑바닥에 남아 있는 한 두방울을 받아 먹는 태룡이 형 모습이 참 안타깝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서울 종합 버스 터미널, 영동*호남선 쪽에 도착한 것은 12시였다. 여행의 마지막 관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짐작도 못했던 것. 버스도, 지하철도 다 끊어진 지금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택시밖에 없었다. 바로 이 택시가 문제였다. 빈 택시는 많았지만 우리를 태워줄 택시는 없었다. 배낭을 울러 맨 네 명을 태울 택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다. 너희들, 너희들을 누가 태워준단 말인가? 택시가 한 대 섰다. 한 명의 선인이라도 있다면, 한 명이라도 이 돈이 지배하는 사회의 틀을 중요시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8천 원만 내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파출소가 바로 저기 있는대도 그들은 이런 행위를 한단 말인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도시란 것이 혐오스러워지고. '내가 왜 이곳으로 돌아왔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 나도 역시 이 자본에 물들었는가? 다른 중형 택시가 한 대 왔다. "제기동, 안암동 로타리." "6천 원만 내요." "아저씨, 오천 원." "그렇겐 안 되요. 생각해 보소, 여기서 고대까지 할증하면 5천 원 안 나온단 말이요. 거기다 천 원만 더 쓰면 안 되는교." "그라면, 미터 요금에다 천 원 더 붙여줄테니 가실랍니까?"하고 성헌이 형이 말했다. 운전사는 물러났다.


나는 흥분에 들뜬 상태가 되고 말았다. 택시에 대한 나의 반감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식당에 물건을 대던 엄마가 짐을 들고 서 있으면 잘 세워주지 않던 택시. 나는 한겨레 신문에 고발 기사라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룡이 형은 "택시 운전사들 말이야. 선거할 때는 앞장 서서 나서던 놈들이, 자기 일에는 이렇게 이기적이란 말이야"하면서 불평하였다.


"걸어갑시다"하고 주환이 형이 의견을 내었다. 이 때까지 많은 길을 걸었는데, 서너 시간 더 못 걸을 것도 없지 않을까? "걸어가요"하고 나도 찬성했다. "지금 어떻게 걸어가냐? 또 집까지 몇 시간 걸릴 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좌석 버스가 한 대 왔다. 12시 반이 넘은 시각에 좌석 버스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이 버스는 성수 대교로 가는 것이었다.


영동역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잡으려 시도하였으나, 어느 택시 하나 거들떠 보는 것은 없었다.


성수 대교가 그렇게 긴 것은 그날 밤 처음으로 알았다. 또 한강이 넓은 것도. 그 다리를 다 건너는 데에는 30분 이상이나 걸렸던 것이다.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까, 풍덩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어린 나무 하나가 다리의 시멘트를 뚫고 뿌리를 내린 광경도 기이했다.


다리가 끝나는 곳에 서 있던 전경들이 조금 겁났으나,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다리가 끝나고 얼마를 더 걸어갔을까? 무학 여고 앞에서였다. 지쳐 앉아 있는 우리를 앞으로 택시가 한 대 와 섰다. 그리고 우리의 여행도 막음이었다.


삶의 무의미성과 죽음의 두려움이 너를 때때로 궁지로 몰아 넣을 것이며, 고통과 인간의 잔인함이 너를 실망케 하기도 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은 근본적으로 누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에게 생명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접할 기회란 없었을 지니, 삶이 네 자유를 뺏어갈 지라도 너는 죽음을 선택할 자유는 있도다. 고통이 두렵다 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