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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서북 능선을 타다 (2) - 1990년 7월의 설악산 기행을 적은 글

by 길철현 2016. 6. 14.



[7월 10일 : 둘쨋 날]

지금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뭔가 신나는, 기대에 찬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소리에선지 잠을 깬 난 눈을 번쩍 떴다. 성헌이 형이 코페을 들고 있었고, 내 옆에 있던 주환이 형이 "형, 몇 시에요?"라고 묻자, 성헌이 형이 "6시 20분이다"라고 대답하는 게 들렸다. "아직 새벽인데 벌써 일어날 수야 없지"하는 주환이 형을 따라 "나두요"하고 나는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가 나이 많은 형이 저러는데 내가 이래선 안 되지, 하는 자책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참치국은 어제 먹다가 남은 김치를 넣어서 시원했으나, 밥은 누가 뚜껑을 열어놓은 탓에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모두 맛있게 밥을 먹었다. 밖에 나와서 먹는 밥, 특히 등산 뒤에 먹는 밥은  맛있다 없다를 가릴 경황도 없이 먹게 되는데, 그것은 육체적인 노동이 우리의 식욕을 돋운 까닭이라 생각된다. 나중에 산에서 밥을 먹으며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밥을 먹으면 소화불량이라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라는 우스개소리도 하였다.


떠나기 전 가게에 가서 나는 비닐을 좀 더 사왔는데, 비닐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사용되었다. 전날 저녁 가게에 들어가 비닐을 얼마 달라고 하자 가게의 노인이 "열 마나!"(덧붙임 '마'라는 단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야드(yard, 91.44cm)를  대신해서 쓰는 단위인 모양이다)하면서 놀라는 눈치를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 정도는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했으나, 실지로는 열네다섯 마는 있었어야 텐트 밑에 깔고, 배낭 덮개 등을 만들 수 있었다. (가게의 이 촌 노인은 별로 붙임성이 없어 무뚝뚝해 보였으나, 그래도 심지는 깊은 사람 같아서 큰이모부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사실 그의 성격보다는 그의 외모에서 느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7월 22일]

예전엔 배를 타고 들어가서 십이선녀탕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민박집 아주머니는 다리가 놓여져 있다고 하였다. 사실 개천도 배로 건널 만큼 깊어 보이지도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날씨도 맑은 편이었다.


입장료는 대학생 할인으로 삼백 원 씩 천 이백 원이었다. 사실상 대학생은 나 뿐이었는데, 주환이 형은 대학원 생이니까 대학생이라 한다 해도 성헌이 형과 태룡이 형은 졸업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가? 사회에 나갔다더라면 초년생의 티를 벗고 자리를 잡을 나이인데도 고시란 게 뭔지. 그러고 보니 요번에 같이 여행을 하게 된 사람들은 다 법대생이요, 사법 고시 준비생이었다. 나이도 내가 제일 어렸다는 것도 여태까지의 여행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평소엔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닌 나는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여태까지 그것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요번에 새삼 그것을 느꼈다. 주책 없음. 이것은 아버지 쪽의 영향이다. 평소에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에 말없이 지내다가도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괜히 말이 많아지는 것, 쓸 데 없는 참견, 괜한 말 거듬, 나 자신의 그러한 모습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어쨌든 입장료는 설악동으로 들어올 때보다는 굉장히 쌌다. 십이선녀탕 계곡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이 날 하루 그러니까 십이선녀탕 계곡을 올라 대승령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내려오는 사람 한 사람, 올라오는(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사람 한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관리소 아저씨는 "대청봉까지 하루만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라는 우리말에 "충분하지"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정말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설악동에 비해 이 쪽은 전혀 개발이 되어 있지를 않았다. 관리소를 지나자마자 막바로 산길이었다. 이제부터는 끝없는 등산이겠구나 하는 것이 실감이 날 정도로 길은 좁고 가팔랐다. 그런데 선두를 잡은 성헌이 형은 앞으로 쭉쭉 잘도 걸어나갔다. 내 머릿속엔 논산 훈련소에서 유격받기 위해 행군하던 기억이 스쳐갔다. 50분 행군에 10분 휴식. 처음의 고통이 지나고 나자 부어오르던 발가락. 그래도 날씨는 좋은 편이었다. 고산 유격장에 다 와가자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불에 덴 듯 뜨겁던 발가락. 그래서 난 뛰었다. 그 다음 고산 유격장에서의 구부. 약 8킬로미터되는 거리를 왕복할 때, 그렇다, 길다란 내리막은 되돌아오는 길엔 그 끝없는 오르막으로 바뀌고 모두 지쳐 헉헉거리고 이제 내 한계의 극한에 왔구나 할 때, 더욱 윽박지르던 교관들. 그러자 어디서인지 모르게 솟아오르던 힘. 좋다, 좋아, 누가 이기는 지, 내가 죽는 (덧붙임 - 죽든지?) 나는 군가를 크게 부르며, 깃대를 인수받아 뛰고 또 뛰었다. 자,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저들보다 우리가 강하다는 것. 그래, 차라리 쓰러져 그들의 요구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자. 막사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의 빈정거림, 그 말은 나에게 독화살처럼 와 박혔다.


"와, 오늘 오르막 올라오는 데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 때 교관들이 우리한테 오리걸음 안 시켰으면 난 정말 쓰러졌을 거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빨리 뛰려고 하는 놈이 있대. 난 그런 비열한 놈은, 남은 정말 죽겠는데 말이다."


몇 분 쯤 걸었을까? 꽤 많이 걸은 것 같은데도 형들은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 안에 집어 넣었다. 그건 지난번 여행 때 석철이한테서 배운 거였다. 그 때 우리는 오백 원짜리 사탕 한 봉지를 사가지고 갔었는데,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다 먹어 치웠던 것이다. 달콤한 사탕이 입안에서 녹자 약간 기운이 더 나는 것 같았다. 아직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러면 어떡하지? 과연 나는 그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을까? 양폭에서 희운각을 오르던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땅에 손을 짚고 기어오르면서도 나는 군인인데, 오기가 있지. 그 때 비는 억수처럼 쏟아지고.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이. 석철아 좀 쉬었다 가자.


"형들, 좀 쉬었다 가요."

"그래, 좋지."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경치는 없었다. 다만 계곡을 끼고 도는 산길. 등산로. 다시 출발. (얼마쯤 걸어올라 갔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휴식 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계곡의 급류에 휩쓸려 죽은 듯한 카톨릭 의대생들의 위령비.) 도대체 이 물에 휩쓸려 죽다니, 이런 얕은 물에, 죽을 수도, (자연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그 위험을 알지 못할 지니, 못할 지니.)


(덧붙임 : 이 위령비에 나오는 의대생들이 사고를 당한 것은 68년. 이 당시에도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인데, 지금은 거의 오십 년이나 지난 일이다. 인터넷에는 매표소에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위령비


왜 나는 이런 고통을 사서할까? 집에서 편안히, 아니다 그건 무위다. 차라리 나는 고통을 택하리라. 그래 나는 그 아무것도 없는 생할을 얼마나 혐오하는가. 흘러가버리는 삶, 살아져 버리는 삶. 나는 두려운 거다. 그것이 두려운 거다. 그렇다. 이번 등산은 그 무위로부터의 탈출. 내 삶의 확인, 확인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것은 성공했던가? 당시,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내 뿌리의 한 깊이에 그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생관을 심었다.)


"인간이 쾌락을 얻기 위해선 고통이 필요한 것 같애." 갑자기 태룡이 형이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상 정복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도 그 과정의 고통은 감수해야 하거든. 세상살이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애."

"그건 다시 말하자면 고통 속의 쾌락, 쾌락 속의 고통이 아니겠어요"하고 나는 키이츠를 인용했다. 짧은 생을 살다간 영시단의 천재, 그가 산 그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그가 남긴 시들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건 거짓말일 거다. 내가 무슨 수로, 그래, 잣구의 해석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그러나 "가을에 부쳐"("To Autumn")는 기억에 남는다. 또 노튼 판의 해설 마지막 부분의 말, "그가 계속해서 살았다면 얼마나 더 큰 업적을 남겼을 지 그것은 미지수이지만, 그가 죽을 당시의 업적을 놓고 볼 때는 그와 동년의 밀턴, 셰익스피어의 업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휴식을 하고 나서도 몸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가파른 바위벽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허벅지가 긁히는 상처를 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산행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만약 여기서 잘못해 부상이라도 입게 된다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닌 것이다. 정신 차리자.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것. 나는 내 실수로 미끄러졌다는 게 부끄러 딴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을 때 내 상처를 본 성헌이 형이 "다리는 왜 그래 됐노?"하고 물었을 때에도 "바위에 긁혔어요"하고 얼버무렸던 것이다. (계속)


(7월 25일)

옛날에 하숙을 하던 이가 두고 간 등산화였지만 나의 발에 꼭 맞았다. 양말만을 신고 신었을 때 약간 헐렁했었는데, 등산용 스타킹을 신고 신자 그것은 나를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양 정말 걷기에 편했다. 정상에서였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나는 "이 신발은 정말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양 발에 딱 맞아요. 걷기에 정말 편해요"하고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는 말을 일동에게 했다.


등산길은 가파르고, 별로 아름다운 경치는 보이지 않고, 어깨의 짐은 무겁고, 뭔가 이거 명성에 비해 별 겂 없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내 눈 앞을 가로 막는 이중 폭포. (이단 폭포)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피어올랐다. 바위를 타고 흐르던 물이 절벽을 이룬 곳에서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고, 소를 이루고 그 소에서 다시 폭포되어 떨어지는 물. 나는 덤벙대면서 (아름다운 자연 앞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형들, 우리 수영하고 가요?"하고 고함을 치며, 그 두 번째의 소로 올라갔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바위로 둘러싸인 연못과 같은 그 소는 천혜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아담하고 잘 꾸며져 있었다. 정말 수영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서 솟구쳐 일어났다. 주환이 형은 위험을 무릎쓰고 물길을 뛰어 건너 폭포로 접근해서는 내보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였다.

(덧붙이 : 이 당시에는 폭포 이름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 폭포는 십이선녀탕의 첫 폭포이고, 이단 폭포라는 점에서 응봉폭포가 거의 확실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미요"라고 한 서정주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 아름다움. 살아서 이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그 숱한 고통은 참아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김치규 선생이 "자연은 그래도 구원이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폭포를 시작으로해서 폭포가 계속 되었다. 그래서 피곤한 것도 잊어버리고,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도 잊어버리고 경치를 구경하며 올라갔다.





점심은 개울가에서 먹었다. 그곳은 폭포가 시작되는 꽤 위험한 곳이었는데도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찔한 순간을 겪었다. 태룡이 형이 물 흐르는 곳에서 별 생각 없이 발을 디딛다가 그만 미끄러져 버린 것이었다. 삐끗하며 넘어지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나는 팔을 뻗어 태룡이 형 손을 잡고 이끌었다. 워낙 찰나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위험이 우리의 머리에 인지되기도 전에 끝났지만, 만약 내가 그 때 없었더라면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우리는 괜히 돌을 그 물결에 던져보았다. 그것은 물결(폭포로 이어지는)을 따라 쏜살같이 내려가다가 바위가 튀어나온 곳에서 튀어오르더니만 폭포로 떨어졌다. 주환이 형과 나는 두 사람이 겨우 들 수 있는 바위도 그 물결에 굴려보았다. 그것도 쏜살처럼 내려가다가 바위가 튀어나온 곳에서 튀어오르는데 그 때는 이미 두 조각이 나있었다. 주환이 형도 그것을 보고 "태룡이 형도 떠내려 갔으면 저렇게 박살나는 건데" 하였다. 우리의 삶, 그렇다 누구던가? 우리 삶 바로 곁에 죽음이 있음을 이야기 한 것이.


요번 여행 동안에 밥이 제대로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날 아침도 누군가 밥통 뚜껑을 열어놓아 밥이 제대로 안 되었는데, 점심은 아침보다는 나았지만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밥이야 잘 되든 안 되든 먹는 덴 상관이 없었는데 (이 때까지의 노동을 생각해 보아라.) 성헌이 형이 밥을 조금만 했기 때문에 이 날 오후 및 저녁 산행에 큰 곤란을 불러왔다. 우리는 이 때 대승령 근처, 그러니까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물이 끊이기 전에 텐트를 치던지, 비가 올지 모르니까 대승령을 넘어 장수대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일기예보는 내일부터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날씨는 비가 올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산의 날씨라는 것은 순식간에 변한다는 걸 지난번 산행에서 여실히 느꼈기 때문에 내 생각은 좀 빨리 올라가서 장수대 정도에서 민박을 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비가 오면 텐트가 젖어 굉장히 무거워지고, 비가 스며들기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했다.


(7월 27일)

"비가 오면 텐트가 젖어 굉장히 무거워지고. . . ." 이 말은 웬일인지 나의 뇌리에 박혔다. 그건 군용 텐트를 쳤을 때, 겪었던 고통과 연관이 있었다. 비를 맞은 텐트를 다시 펴서 날씨 좋은 날 말리던 그 기억, 그것은 지긋지긋 했던 모터풀에서의 날들과  또 고리를 맺고.


내 짐이 준 것은 없었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까 훨씬 힘이 났다. (출발 전 있었던 일 중 한 가지 첨가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가 밥 먹은 곳에서 한 이십 미터 위에는 또 다른 폭포가 있었다. 나는 폭포 밑으로 헤엄쳐 가 볼 심산으로 옷을 벗고 (다 벗어 버릴까 하다가 혹시라도 사람이 지나갈까 해서 팬티만은 입고. 그러나, 내 의식 속에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완전히 알몸이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 아니면 지나가는 여자가 나의 알몸을 보고 사랑해 주엇으면 하는 욕망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심한, 아니 길들여진 인간) 물로 들어갔다. 물이 찹(차)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차울 줄은 몰랐다.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온 몸을 적신 태룡이 형(옷을 입은 채로)이 "완전 얼음물이다" 했을 때도 나는 반신반의 했었다. 나에게 지난번 석철이와 산행을 왔을 때 바로 이와 똑같은 계곡물에서 수영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온 몸을 물에 담그고 팔을 몇 번 허우적거리던 나는 폭포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물밖으로 나와 버렸다. 정말 차가웠다. 얼음물이라도 이보다야 낫지 할 정도였다.) 점심을 먹은 곳으로부터 두세 개의 폭포가 더 이어지고, 그 다음엔 그냥 계곡 옆의 길을 걸어 가다가 급기야는 계곡과도 떨어져 가파른 산길을 걸어올랐다. 처음엔 태룡이 형이, 그 다음엔 주환이 형이 기력이 바치기(빠지기)라도 했는지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주환이 형이 라면을 찾았다. 나는 라면이 모자라지 않을까 해서 망설였지만, 꺼내지 앟을 수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라면을 몇 개 더 사 둔 것이 좋았다. 이 때부터 대승령까지 오르는 길은 악전고투였다. 십 분쯤 걷다가 오 분 정도 쉬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형들이 힘들어 하면 할 수록 나는 기운이 솟는 것이었다. 이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나의 악마적인 취미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마치 논산 훈련소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정말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일까? 주환이 형은 못 올라 간다고 악을 쓰고, 나는 주환이 형 뒤에서 형을 밀어댔다. 가벼운 배낭을 맨 중년의 아저씨가 우리 뒤에서 걸어왔다. 그는 조금 걷고는 호흡이 가쁜지 멈춰 서고, 멈춰 서고 했으나 꾸준한 속도로 올라왔기 때문에 우리 뒤로 쳐지지는 않았다.


가파른 고갯길을 다 오르고 나자 오른편에 안산이 보였다. 봉우리 하나만 툭 솟아오른 게 기이한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그와 비교할 정도로 높은 봉우리가 하나도 없었다. 이 때부터 대승령까지의 길은 지금까지의 길과 비교해볼 때 탄탄대로였다. 산길이 이런 식으로만 되어있다면 걷는다는 것이 식은 죽 먹기겠지만 산길을 걷는 맛은 십분 감소되리라. (사실상 산길은 그 힘들고 쉬움이 경사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승령 갈림길에서 휴식하면서 우리의 의견은 "오늘 밤에는 비가 올 것 같지 않으니까 장수대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자도록 하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나는 오늘 안으로 충분히 대청봉에 갈 수 있다는 관리소 아저씨의 말을 흉내내어 "충분하지"라는 말을 액센트를 주어 발음했다. 태룡이 형은 우리가 점심 먹고 많이 놓았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대청봉까지 하루 만에 올라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대승령에는 장수대에서 오라오는 사람이 몇몇 눈에 띄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의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추억과 고생을 선사했다. 행선지를 이야기해보니 그는 우리와 같이 서북 능선을 탈 모양이었다. (탄다고 했다.) 꽤 험하다고 (초보자에게 있어서) 알려져 있는 서북능선을 혼자 타는 폼이 등산의 전문가인 것 같았다. 그는 우리들을 유혹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가는 게 그래도 나은 모양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준 빅카드는 서북 능선에 샘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서북 능선 상에는 샘이 없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은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혼란이 왔다. 그의 말로는 여기서 두 시간만 가면 샘이 있고, 거기에 텐트로 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무리를 하면서 산행을 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반대를 했다. 태룡이 형은 피곤해서 자기는 웬만하면 장수대 쪽으로 내려가 텐트를 치고 내일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주환이 형과 성헌이 형은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아까(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 죽을 것처럼 하던 주환이 형이 날(생)라면 먹고는 힘이 났는지 가자고 우겼다. 성헌이 형은 "우리가 여기서(장수대 쪽에서) 텐트를 치려고 했던 것은 서북 능선에 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물이 있다면 여기서 텐트를 칠 필요가 없지"하고 주장을 내세웠다. 나는 그리 지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따라간다 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지금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또 어디를 걸어간다는 거예요. 웬만하면 그냥 여기서 자지요"하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파가 갈렸다. 서로 의견을 양보하지 않고 팽팽히 맞서고 있는 사이에 우리를 유혹한 그 사내는 길이 바쁘다며 떠나버렸다. 머무르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진 듯했다. (사나이가 떠남으로 해서.) 그러나, 성헌이 형이 또 다시 의견을 내세웠다. 주환이 형도 "아까까지만 해도 죽는 것 같았는데 이제 괜찮다. 그러고 작년에 내 친구들이 여기 왔었는데 길을 몇 번이나 잃어버렸다고 하더라. 그래도 아는 사람 따라가는 게 안 낫겠나?"하고 가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유혹자도 우리에게 그렇게 겁을 줬었다. 자기도 처음에 올 때는 길을 몇 번 잃어버렸다고. 그러자, 부대 졸병이었던 원홍이(조원홍 씨)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리본만 따라가면 길 안 잃어 버려요" 하던 그 말. 등산을 좋아하던 그가 설악산(서북능선)을 다녀온 뒤 내게 한 말이었다.


약 십 분 쯤 허비했을까? 성헌이 형의 "물이 있다"는 말의 강조가 위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분위기는 자꾸 유혹자를 따라가자는 쪽으로 흘렀다. "지금 그를 쫓아갈 수도 없잖아요?"하는 나의 항변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주환이 형이 먼저 앞장섰다.


(7월 28일)

주환이 형은 (우리의) 유혹자를 따라 잡기 위해서 부지런히 걸어가버렸다. 얼마간 걸어가던 나는 이러다 길을 잃고 산을 헤매이는 건 아닌가 하는 겁이 덜컥 났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막 헤매이다가 보니 바로 밑이 절벽이었어요. 얼마나 아찔했는지, 물도 없고 생쌀 씹어 먹는데 어디서 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물소리를 따라 가보니 바위 틈새로 샘물이 솟아나서 겨우 밥을 해먹고 텐트도 제대로 못 치고 거기서 밤을 새웠죠."


내 머릿속에 설악산에 가서 길을 잃은 경험담을 얘기해 주는 기원(덧붙임. 정기원은 이후 유명인사 되었구나. 장호일이라는 예명으로 동생과 함께 01OB의 멤버로 활동을 했지.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이의 목소리가 또렷이 떠올랐다.


"성헌이 형, 웬만하면 돌아가서 계곡에서 텐트치죠."


성헌이 형도 약간 피곤함을 느껴서인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만약 그 유혹자를 못 만난다면, 그렇데 된다면. "주환이 형"하고 나는 큰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주환이 형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유혹자의 것이었다. 사태는 급진전되었다. 이제 우리의 유혹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샘터는 귀떼기청에 삼십 분 정도 못 미친 곳에 있다고 했다. 정상적으로 걷는다면 두 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그러나, 이 길은 예상외로 길고 힘들었다. 수통에 가득 채웠던 물도 얼마 가지 않아 거의 동이 나고, 배가 고픈 나머지 생라면을 몇 개씩이나 깨먹었다. 앞서서 가던 주환이 형이 뒤로 쳐지고, 성헌이 형과 내가 앞장 서서 걸었다.


능선의 길은 원래 험한 곳이 몇몇 군데 있지만 힘이 빠진 우리들에게는 하나같이 벅찼다. 지금도 풀리 않는 의문은 갈래길에 놓여있던 커다란 풀이었다. 길 위에 풀이 두 개 놓여져 있었는데, 그게 그리로 가는 게 맞는다는 표시인지 아니면 그 길로 가지 말라는 표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풀이 놓여져 있는 곳에도 리본이 있었고, 다른 길에도 리본이 있었다. 좀 난감해졌다. 이런 길은 만나는 길인 경우가 많았지만 두 길의 방향이 워낙 틀렸기(달랐기) 때문에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유혹자가 이렇게 길을 표시해 놓은 게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나중에 사실을 확인해 본 결과 그가 표시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먼저 풀이 놓인 곳으로 가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나, 찾기가 힘들었다. 지도에는 전혀 갈래길의 표시가 없었다. 성헌이 형이 먼저 풀이 놓여져 있지 않는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풀이 놓여져 잇는 모양이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형의 뒤를 따라 올라가서 "아저씨"하고 불러보았다. 저쪽에서 응답이 없었다. 웬일일까? 나는 혹시나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해서 벌써 몇 번 그를 불렀던 것이다. 내가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태룡이 형 귀에 거슬리는 모양이었는지 "아저씨는, 무슨 아저씨, 나이 니보다 몇 살 많다고"하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길은 이번 등산 중에서 가장 난코스였다. 워낙 길이 험했기 때문에, 혹은 길을 잘못 든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나중에 태룡이 형은 "그 정도야 C급(뒤운 코스란 말)이지"라고 했지만, 나에겐 그 코스가 굉장히 어렵게, 아니 사실은 주백이 생각이 났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 주백이는 이렇게 두 손을 다 써야 하는 코스는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성헌이 형이 먼저 앞장 서서 걷고 나는 자꾸 뒤로 쳐졌다. 외길이어서 길을 잘못 들 염려도 없는데, 성헌이 형을 놓친다느 게 두려워서 힘을 내어 걸었다. 겉으로는 별로 안 지친 척, 아니면 표면적으로 별로 피곤하지 않았는지 몰랐으나, 나에게도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아저씨"하고 크게 소리쳤다. 멀리서 대답이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행이다. 안경은 쓰면 불편했고, 안 쓰면 불안했다. 땀이 차면 안경에 습기가 배고, 그래도 완전히 벗어버릴 순 없었다. 둘째 날, 셋째 날도 (산에서) 안경 때문에 많은 불편을 겪었다. 썼다, 벗었다. 습기가 배면 닦아줘야 했고.


얼마를 걸어갔을까? 태룡이 형과 주환이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은 분명 성헌이 형과 내가 올랐던 그 꼭대기(봉우리)를 넘었어야 하는데, 아직 그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는 소리쳐 불렀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성격. 그런데 주환이 형 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초조해 하지 말자. 초조해 하지 말자. 나는 성헌이 형을 불러세워 좀 쉬자고 하였다. 얼마 후에 주환이 형과 태룡이 형의 모습이 꼭대기에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고, 조심해야 할 갈림길을 하나 이야기했다. 사실 그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평상시대로 걸어와도 엇갈리지 않을 길이었다. 나중에 태룡이 형은 우리의 유혹자를 나무라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쉬운 길도 꼭 어렵게 이야기 한단 말이야"하고 이야기했는데, 그게 꼭 나를 빗대로 하는 이야기 같았다. (이런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어쩌ㅕㄴ 그건 나의 신경과님이었을지도 므로고, 어쩌면 그건 나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그런게 나한테 있단 말인가?) 눈인지도 몰랐다.)


여덟 시쯤 되었을까? 성헌이 형과 나는 주인 없이 놓여져 있는 배낭 하나를 발견했다. 이 길로 지나간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저씨 유혹자의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배낭 색깔도 아까 봤을 때의 그것이었다. 성헌이 형은 한 번 더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그 때보니까 수통을 배낭 맨 위에 넣더라"하고 이야기 했다. 주인 없는 배낭을 연다는 게 좀 께름직했지만 살짝 열어보았다. 수통이 들어있었다. 성헌이 형은 태룡이 형과 주환이 형을 맞이하러 가고, 나는 앉아서 기다렸다.


저편 산꼭대기(그 산은 돌산이었다)에 한 사람이 보였다. 유혹자였다. 나는 소리쳐 그를 불렀는데 그는 대답이 없었다. '왜 남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할까?' 약간 기분이 상했다. 잠시 후 다가온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청천벽력(과장이 심한가?)과 같은 말이었다.


"샘을 못 찾겠네요? 여기가 분명히 작년에 왔을 때 텐트 친 곳이 맞거든요. 그런데 샘이 안 보이네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리로 내려가는 길이 뚜렷이 나 있었는데."


갑자기 기운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말을 믿고 이 힘든 길을 왔는데. 이런 등치는 소리를 하다니. 우리보다 30분쯤 뒤에 도착한 주환이 형과 태룡이 형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유혹자가 그 이야기를 직접하는 건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내가 대신 해주었다. 모두 기운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기왕지사 이렇게 된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내 마음 한편에선 '그 봐, 내 말을 안 듣더니'하는 심사도 없지 않았다. 그는 "일단 오늘은 일찍 자고 여기서부터 한 시간 쯤 더 가면 한계령이 나오니 내일 아침 거기 가서 밥을 먹자"고 제의했다. 별 수 있나? 그의 제의를 따르는 수밖에. "어두워 지기 전에 빨리 텐트를 치자"는 성헌이 형 말에 텐트를 치고, 텐트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리고 텐트를 치는 데는 네 명이나 필요하진 않으니까) 산 밑으로 샘을 찾아 내려갔다. 사람들은 별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심리로 한 번 찾아보라 했다. 나는 영웅심리에 들떴는지도 모른다. 길도 없는 곳을 내려가려니 뱀을 만날까봐 두려웠지만 그 보다는 바로 앞에 닥친 급박함이 더 급선무였기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누군가 걸어갔던 흔적, 예전에는 길이었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샘을 찾을 가망성은 없었다. 또 예전에 팔공산에서 헤매던 기억, 밤중에 텐트 친 곳엣 산꼭대기로 삼십 분 정도 올라갔다가 길을 잃어 헤매던 기억도 있고 해서, 나는 올라왔다. 내가 내려간 거리는 불과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도 내 마음 속에선 굉장히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성헌이 형이 가져온 텐트는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것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치기까지는 꽤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날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고, 형들은 약간씩 짜증을 냈다. 그 짜증, 서로서로에 대한 짜증 -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남을 탓하고 - 을 보면서 나는 군대의 일을 떠올렸다. 작전을 나가 힘들 때 서로에게 짜증을 부리던 광경, 논산 훈련소 시절, 또 인간의 검은 본성을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를 다 쳤을 때 쯤일까? 우리는 우리보다 더 황당한 사람들을 만났다. 9시 반 쯤이었을 것이다. 세 명이 우리가 텐트 치는 곁을 지나가면서 "대청봉에 가려면 아직 멀었읍니까?"했다. 정말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사람들이었다. 이 오밤중에 대청봉까지 걸어간단 말인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려고 하지. "지금 어떻게 대청봉에 간단 말씀이세요. 대청봉에 가려면 밤새도록 걸어야 하는데."


그들은 우리의 유혹자와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혹자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스스로의 무모한 계획을 깨달았는지 우리 옆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그들이 온 것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이 물통에서 (수통 말고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통) 물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식수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서글픈, 그러나 기억에 남을 밤이었다. 태룡이 형은 정말 피곤한 모양이었다. 2차 시험 준비를 하느라고 잠도 못 자고 고생했을 텐데, 또 산에 와서 이 고생이니 그럴만도 했다. 태룡이 형은 겉으로 생생한 것처럼 보이는 나를 보고 "나도 니만할 때는 펄펄 날았는데"하고 부러운 듯이 이야기를 했다. 태룡이 형은 자리에 눕자마자 골아 떨여졌다. 유혹자는 아까 텐트를 치기가 무섭게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겨우 잠만 잘 수 있는 일인용 텐트가 웬지 처량해 보였다. 주환이 형과 나는 생라면 두 개, 참치 두 개를 꺼내 밥대신으로 먹었다. 뭐라도 먹어두는 게 중요했다. 내일 아침에는 또 얼마를 걸어가야 하니까.


등산의 참맛은 고생에 있는 것일까? 주환이 형은 혼자서 캡틴 규를 홀짝홀짝 마셔댔고, 나도 안 마시는 술이나마 한 잔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