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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서북 능선을 타다 (1) - 1990년 7월의 설악산 기행을 적은 글

by 길철현 2016. 6. 7.


[덧붙임] (공룡 능선 등반(?)기를 써나가는 중에, 26년 전 여름 방학 때 하숙집 형들 - 이 형들은 모두 고시를 준비하던 법대생들이었는데 - 과 같이 설악산의 서북 능선을 종주한 뒤 공책에 적어둔 글도 이 참에 블로그에 올려보려 한다. 이미 올렸던 88년의 [여름 산행]에 이어 두 번째로 대청봉을 밟았던 그리고 비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을 했던 산행이었다. 160607) (띄어쓰기와 최소한의 맞춤법 교정 정도만)





[7월 15일]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나의 글을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부러진 내 붓을 그 전대로 이어놓을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고민이다.

솔직해 지자.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 때에 나는 어디서 진실을 찾아야 할지 그걸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하나의 위안, 그렇다, 내겐 하나의 위안이 있다. 그건 아직은 모든 게 끝장 나 버리진 않았다는 점이다.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내게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욕망은 타당한 것일까?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삶은, 삶은, 서두르지 말지어다.


<'설악산 기행'을 쓰는데 몇 가지 원칙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다.>

1. 가능한 한 진실에 도달하려 노력할 것.

(자신의 사고를 막지 않는다는 것, 자유를 구속하지 말 것)

2. 문법에 연연해 하지 말고 볼펜으로 그냥 쓸 것.

("퇴고"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전체적인 느낌을 중요시 할 것)

3. 시간적 여유를 둘 것.

4. 독자를 의식할 것.

(이 말이 1과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 서북 능선을 타다.

3박 4일의 여행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 나는 그것에 이번 기행문의 주안점을 둔다. 그렇게 된다면 이 글을 기행문이라 부를 수 없는 게 사실인지도 모르나, 여행의 경로보다는 나에겐 자연에서 느꼈던 감정과 등산로를 따라 걸을 때 내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적어나갈 것이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나가야 할 이유를 나는 이번 여행에서 찾았는지, 아니면 그것은 위안에 지나지 않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말하기가 힘들다. 그 때 떠오른 생각들의 10분의 1이라도 제대로 적어낼 수 있을 진 의문이지만, 이 글을 적어나가는 동안에 나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목숨보다도 진실이 더 중요하다면 나는 내가 불의라고 확신하는 것에 대해 항거할 자신이 있는가? 나약하고, 위대하고, 어쩌면 인간은 이리도 뒤틀려 있는 것일까?


[7월 9일 : 첫째 날]

고등학교 3학년 반창들과 만나 여관에서 쌕쌕이를 보고 들어오니 하숙집 형들은 벌써 장비를 꾸리고 있었다. 3일 전인가 형들이 "설악산에 놀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에 나는 선뜻 승락을 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현재의) 나에게 여행은 좋은 약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가슴을 꽉 죄여오는 삶에 대한 의혹,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만약 삶이란, 생존이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등산 장비라곤 하나도 없었으므로 장비를 꾸릴 필요는 없었다. 내가 등산한 경험이라곤, 즉 산에서 하룻밤 이상을 잔 기억이라곤, 고향인 대구 근교에 있는 팔공산에 등산했던 것과, 친구 (고 3 때) 석철이와 군에 근무할 때 휴가를 틈 타 설악산에 올랐던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이런 경험의 부족 때문에 형들의 빈축을 약간 샀다. 어떻게 보면 그건 나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나의 조급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옷가지를 챙긴 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갔다. 농구화를 하나 사서 등산화 대신으로 삼을까 하고 프로스펙스 대리점으로 갔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서 그냥 나왔는데, 등산화는 (하숙)집에 남겨져 있던 것을 신게 되었다.


학교 내에 등산 장비를 파는 데로 가서 우리는 필요한 장비들을 구입했다. 나는 큰 맘 먹고 침낭과 코펠을 샀다. 형들이 회계를 나에게 맏겼을 때 나는 은근히 기뻤다. 무언가 책임이 있다는 건 이런 경우엔 누구든지 신나게 하는 것 같다. 주환이 형은 침낭과 판초를 사고, (요번에) 여행을 떠나는 네 사람 몫으로 스타킹, 공기 베게 등을 샀다.


시장에 가서 찬 거리며 쌀 등을 사고 나니 회비로 거둔 십이 만원의 반이 나갔다. 출발하기도 전에 회비의 반을 써 버리다니 회비로 여행비를 다 충당하기란 무리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리에 떠올랐다. 태룡이 형은 돈을 아낀다며 청계천까지 나가서 싼 침낭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


이럭저럭 정리가 끝나고 나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상봉 터미널에 전화를 한 번 걸어볼까 하다가, 설마 차가 있겠지 하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우리는 떠나기 직전에 하숙집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문을 나섰다.


상봉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10분. 처음에 나는 형들이 설악동으로 해서 천불동 계곡을 탄 뒤 백담사 쪽으로 내려오는 줄 알았으나, 십이선녀탕으로 해서 서북 능선을 탄다고 하는 걸 듣고는 기분이 좋았다. 나의 반대가 형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형들이 처음에 가기로 한 그 코스는 내가 친구와 함께 설악산에 갔을 때 탄 코스와 일치하기 때문에 나는 강력히 그 코스를 반대했던 것이다.


5시 반, 십이선녀탕 어귀에 있는 남교리로 가는 직행 버스가 발차하자 나는 야릇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상봉 터미널 직원들의 태도가 불친절했다는 것도, 또 매점에서는 성냥은 팔지 않고 라이터만 내놓았다는 것도 당시 내 머릿속에는 자리잡을 수 없었다. 그런 내 가슴 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떠난다는 것에 대한 어떤 기대였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어떤 곳으로, 내가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쉽게 말하자면 나의 경험 내에 존재하지 않는 꿈, 그것이 실재할 것만 같은 어떤 곳으로,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자의 위안이오, 환상에의 몰입, 현실에서의 도피다.


[7월 16일]

상봉 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양평, 홍천 인제를 지나 9시 40분에 남교리에 도착했다. 나는 버스가 춘천을 지나서 가는 줄 알았으나 길은 예상과는 좀 달랐다. 지도를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양평을 지날 때엔 올 봄에 과친구 대중이와 용문산에 놀러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양평 시외버스 터미널로 들어가는 길목에 (내 성과 같은- 덧붙임) [길병원]이라는 병원이 있는데 그것도 나의 시선을 끌었다.


팔당과 대성리를 혼동하고 나서 나는 "왜 이다지도 자연해 대해, 혹은 지리에 대해 둔감할까?"하는 생각도 했다. 양평을 지나면서부터 성헌이 형과 주환이 형은 어젯밤 월드컵 축구 결승전을 보느라 피곤했음인지, 아니면 무료한 시간을 잠으로 달래려는 심사에서인지 눈을 감고 있었다. 태룡이 형과 나는 설악산 지도를 내어놓고 능산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계획대로라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코스였다. 십이선녀탕에서 서북 능선을 거쳐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


잠시 팔당을 지날 때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겠다. 버스가 팔당 댐을 올라갔을 때 본 그 어마어마하게 넓은 호수. 바다만 같은 호수. 주환이 형은 소양댐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이 팔당댐은 그것과는 또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그건 다만 현실 패배자의 단순한 낭만에 지나지 얺을까?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꿈은. 인간은 인간을 벗어나서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일까? 예이츠여, 그대는 왜 그대의 시를 배반하려 하는가?


용문을 지나면서부터는 내가 예전에 지나가 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새롭다는 것, 예전에 지난 적이 없는 새로움. 버스 안은 에어컨으로 시원했으며 평일 오후라 차도 그리 복잡지, 아니 오히려 한산한 편이었다. 다만 우리가 사온 김치가 뜨거운 차의 바닥에서 익어가는 냄새 만이 우리를 자극할 뿐.


산은 점점 깊어지고, 공기도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맑아지고, 인적이 뜸해지다가 날도 어느 덧 저물고, 갑자기 만나는 드넓은 강, 그것은 나중에 알고보니 소양강이었다.


원통에서는 귀가하는 중고생들이 많이 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있어서 교복 자율화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 오던 복고 바람이 이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복을 입는다는 게 나는 몹시도 못 마땅하다. 획일적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그것은 알게 모르게 군복의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군복, 군대, 전쟁, 삶의 두려움은 전쟁이 또 한 몫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내리는 곳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변에 앉은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우리가 내려야 할 곳을 물었다. 성헌이 형은 인제를 지난 뒤부터 앞 좌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처지였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차를 타고 온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네 민박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만 원이라고 우기는 걸 깎아서 팔천 원으로 했다. 방은 네 명이 자기엔 넉넉했고 이불도 내어 주었다. 라면으로 저녁을 대강 떼우곤 고돌이 판을 벌였다. 나는 가게에 가서 소주랑, 음료수, 비닐 등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 오지 못한 물건들을 몇 가지 더 샀다. 이날 고돌이 판의 운수는 나에게 있었던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갔다. 평상시대로라면 내가 잘못 친 것인 데도 그게 오히려 운이 되어 돌아왔고, 남이 싸놓은 것도 내가 잘 먹었다. 나는 양피박을 씌워 일 인당 삼천 육백 원이라는 거액을 벌어들여 일치감치 판을 내 판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