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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90년대이전)

여름 산행 --88년 7월에 고등학교 동기인 최석철과 2박 3일 동안 설악산 산행을 한 것

by 길철현 2016. 6. 6.

여름 산행

 

---서문 (덧붙임. 이 글을 쓴 것은 여행을 하고 두 달 정도 뒤였다.) 

글을 쓰긴 쓰고 싶은 데 무엇을 쓰야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만 생각을 해보니 역시 쓸 것은 너무도 많았다. 무엇을 쓰느냐 보다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글을 쓸 때는 항상 두려운 마음이 든다. 꼭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딜 때와 같은 기분. 종찬이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글을 꽤 많이 써놓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보다는 글쓰기가 힘들고 두렵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

 

1.(8876)

여덟 시 삼십 분 경에 석철이가 우리 집으로 왔다. 원래 여덟 시에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 정도의 지각이야 눈 감을 수밖에. 사실상 나도 방금 전에 준비를 끝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준비물을 점검해 보았다. 빠뜨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라면과 찬거리 등은 현지 조달하기로 했다.

휴가의 삼분지 일을 요번 등산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너무도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만 오던 군대 생활에서 떠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길로써 다소 힘이 들더라도 등산을 계획했던 것이다. 3때 같은 반이었던 석철이가 운좋게도 나랑 휴가가 겹쳐 사전에 계획을 짜두었다.

대장정의 출발이다.

아 한 가지 빠진 게 있었다. 돈이다. . 어딜가나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니는. 이럴 때는 언제나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부족한 대로라도 꾸려나갈 수밖에 없는 돈.

어머니로부터의 삼 만원의 원조, 그리고 휴가비 만 원을 손에 쥔 나는 그런 대로 든든했다.

위험한 곳으로는 가지 말고 빨리 돌아 오거래이.”

내 몸 내가 알아서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럼, 다녀 오겠읍니다, 어머니.”

갔다 오께.”

어머니는 못내 걱정이 되는지 신신당부 조심하란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 어엿한 성인.

 

2.

석철아, 우리 차비만 할인하면 돈 많이 절약할 수 있을 텐데. 될지 모르겠다. 전번에도 내가 후포갈 때 사복 입었다고 할인 안 해 주던데. 이야기 좀 잘하면 될지 모르겠네. 그 때도 내한테 매표하는 아가씨는 안 된다고 잘라서 거절했지만 그 옆의 아가씨 눈치는 해주라는 것 같았다.”

그 때 그 옆 매표구의 아가씨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참했다라는 인상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실지 상황은 전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낯짝 두꺼운 석철이가 거의 3-4분 실강이를 벌였음에도 대답은 노우였다.

우리 부대는 특수 부대라서 사복입고 못 나오게 되어 있는데요.”

석철이의 최후의 단서에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았다. 강릉까지 직통으로 가는 건 10시에 있었고, 직행은 928, 금시라도 떠날 지 모를 판이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오자 개찰구 문은 이미 닫혀졌고 차는 벌써 시동 소리가 요란했다. 개찰구의 아저씨가 어디 갔다 오느냐고 호통을 치고 버스 안에서는 석철이의 손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3.

석철이와 [코스모스]에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나는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내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는 걸 깨닫고는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귀를 열지 않으려면 말도 마라.’

대구를 출발한 버스는 경주, 포항, 영덕, 삼척 등지를 지나 다섯 시에 목적지인 강릉에 도착했다.

거의 8시간이나 걸린, 정말 생애 가장 최장의 버스 여행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길이었다. 중간에 두 편의 비디오 [최가박당]과 김병조의 [난 이렇게 산다우]를 보고 나도 목적지는 요원했다. 버스는 거의 모든 정류소에 정차했고, 우리는 곳곳에서 군것질을 했다. 동해 바다도 옛날 같은 마력을 나에게 던져주지는 못했다. 예전엔 내 가슴을 마구 뒤흔들던 푸른 빛 바다였는데. 아직 개장을 하지 않은 해수욕장도 쓸쓸하기만 했다.

      

4.

버스를 내리자마자 민박꾼들이 우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 중 한 사람은 유별났다.

대학생이시죠. 저도 사실 대학생입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요. 저도 여러분 사정을 잘 아니까 딴 데처럼 바가지 씌우고 그러지 않습니다. 딴 데서 민박 구하려면 칠천 원 아래로는 안 됩니다. 그러고 시설도 우리 여관만 못하고요.”

저희는 여기서 잘 것도 아니고요. 그냥 경포대나 들러보고는 설악산에 들어갈 겁니다.”

석철이의 대꾸.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으면 일박하고 가셔야지요. ‘동일 여관으로 오십시오. 싸게 해드리겠읍니다. 이화 여대에서 단체로 저희 집에 묵고 있으니까 같이 노실 수도 있고요.”

텐트가 있는데 꼭 민박할 필요 있읍니까?”

그건 모르시고 하는 말입니다. 아직 해수욕장이 개장을 안 해서 텐트는 일절 못 칩니다.”

나는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너무 직업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고, 서울 말씨를 쓴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뿌리치고 떠나는 우리에게 그는 명함을 내밀며,

거기 가 보시면 알겠지만 딴 데보다 저희 집이 제일 싸고 좋을 겁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서 경포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뒤에서 누군가가

경포대로 가시는 모양이죠.”라고 했다.

사람들의 지나친 상술에 화가 났던 나는 대답도 않고 있는데, 석철이가 그렇다고 했다.

어디 숙소라도 정하셨읍니까? 아직 안 정하셨다면 저희 집에서 민박하시지요. 아주 싸게 해 드릴테니.”

또 시작이군. 이 놈의 장소는 왜 이 모양이야.’

나는 절로 분통이 터졌다. 그러나 석철이는 다소 호의적이었다.

얼마면 되겠읍니까?”

삼천 원만 내십시오. 딴 사람에게는 이렇게 안 하는데. 두 분이고 하시니까.”

철현아, 어떻게 할래. 어차피 텐트 친다고 해도 샤워하고 하는데 돈이 들 거 아니가.”

삼천 원이면 그러지 뭐.”

 

5.

저녁을 먹고 수영을 하러 갈까수영하고 저녁을 먹을까라는 두 가지 선택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결정했다. 짐을 풀면서 나는 특히 지갑에 주의를 기울였다. 배낭에서 지갑을 꺼내서 이불 밑에 숨기고. 왜 그런진 분명히 모르겠지만--그건 낯선 곳에서의 불안 때문이었으리라--모든 사람이, 석철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의심스럽게 보이는 것이었다. 타인. 나에게 이익보다는 해를 끼칠 위험이 더 큰 사람들. 그러나, 상황은 나의 불안이 필요이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그들도 나와 같이 휴가를, 여름 여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었다.

열쇠를 주인아저씨에게 맡긴 우리는 수영복 차림으로 해수욕장으로 뛰었다. 나는 실지로는 수영을 할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란색) PT복 하의만을 넣어 왔던 것인데 임시변통으로 그것으로라도 수영복 대용을 해야 했다.

사람들이 몇몇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나, 물속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어린애 두 명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을 입고 있었다.

풍덩

물로 뛰어 들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물의 차가움보다는 바닷물의 짜가움이었다. 소금기 때문인지 약간만 물이 입으로 들어가도 역겨웠고, 눈을 뜨는 것도 따가워서 힘이 들었다.

석철이는 속칭 맥주병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통의 초심자와는 달리 수영을 배우겠다는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있어서, 고개를 물에 담그고 앞으로 나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파도가 심해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영법은 평영뿐이었다. 파도가 밀려올 때 몸도 파도를 타게 해서 물이 입이나 코로 들어오지 않게 했다.

석철이가 자기 폼이 어떠냐고 한 번 봐 달라고 했다. 사실 폼이 제대로 나올 리가 만무했다. 몇 가지 어색한 점을 지적해 주고 계속 연습하라고 했다.

그 때 내 머리 속에는 뭍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바위섬까지 헤엄쳐 갈 생각뿐이었다. 오백 미터 정도는 거뜬히 헤엄쳐 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나였지만, 파도는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가는 데까지 가다가 안 되면 돌아오지 뭐라는 생각으로 평형으로, 그 바위섬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실지로 그 바위까지는 백 미터가 훨씬 넘는 지도 몰랐다. 물에서는 사물이 가깝게 느껴지니까.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나아가도 그 바위는 가까워지질 않았다. 그런데, 발밑에 갑자기 바닥이 느껴졌다. 분명 내가 지나온 곳은 한 길을 훨씬 넘었는데 이쪽은 가슴 정도까지 밖에 물이 차지 않았다. 약간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한 발 씩 나아갔다. 발바닥에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져서 도대체 이게 뭘까하는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 보다도 바위섬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그냥 나아갔다. 바위섬이 바로 눈앞에 다가섰다. 조금만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순간 그 때까지 참아왔던 추위와 떨림이 나를 덮쳤다.

무얼 하기 위해 나는 저기 저 바위섬에 가려고 애쓰는 걸까? 그건 오직 딴 사람이 하지 않은 걸 내가 했다는 허영심이 아닌가? 돌아가자. 더 이상 추위에 떨 그 무엇도 없으니.’

발바닥에 예의 그 딱딱한 무엇이 느껴졌다. 첫 번째 잠수. 실패. 물속은 생각보다도 더 흐릿했고 무엇보다도 눈을 뜨는 게 싫었다. 두 번째. 건지고 보니 그건 역시 조개였다. 내 상상 속의 해괴한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았다.

 

6. 

밥을 하는 것은 새로운 기쁨. 경험은, 그것도 직접 경험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설사 그것에 오류가 있을 지라도,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수첩의 노트에서

 

해수욕장에서 돌아온 석철이와 나는 저녁을 짓기 시작했다. 대학교 때 엠티가서 밥하는 걸 돕고, 그릇을 씻는 등의 일을 한 적은 있었으나 직접 밥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구입한 버너는 소형이지만 화력은 굉장히 좋았다. 사용법도 간편해서 정말 잘 샀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대강 쌀을 씻고, 눈짐작으로 물을 부어 왔더니만, 석철이가 손바닥으로 쌀을 누르면서 물의 양을 측정해 보더니만 너무 많다고 하면서 코펠 그릇으로 물을 떠냈다. 캠핑이나 등산의 경험이 나보다 월등히 많은 석철이와 왔다는 것이 듬직했다. 사실 나는 이 때까지 등산다운 등산이라고는 가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팔공산에서 하루밤 잔 것 정도랄까?

저녁을 먹고 난 우리는 경포대로 산책을 나갔다. 벌써부터 손이 근질근질했던 나는 석철이를 꼬드켜서 당구장으로 갔다. 하지만 경포대 당구장은 나를 반기지 않는지 스트레이트로 두 번 지고 말았다. 석철이가 너무 잘 친 것도 있었지만. 당구비는 생각했던 대로 비쌌다. 어느 곳이든지 유흥지는 물가가 비싸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기념품 상점 앞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해서 색돌을 한 봉지씩 샀다.

갑자기 석철이가

, 집에 전화 안 걸고 싶나?” 하고 물었다.

전화는 왜?”

이십 원만 있으면 전화할 수 있다카이.” 하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마침 십 원짜리 동전이 두 개 있어서 건네 주었더니만 장거리 공중 전화에다 이십 원을 넣고는 대구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니, 지금 얘가 뭘하는 걸까? 이십 원으로 어떻게 여기에서 대구가지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걸까?’

그런데, 전화를 보통 방식으로 거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번호를 계속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누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 누르면 전화가 되는 수도 있단 말이야.”

결국 돈만 잡아먹고 끝내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석철이가 자기 집으로 재시도 했을 때는 되었다. 포장마차에 가서 가볍게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우리가 민박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열한 시를 넘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다가 보니 집 뒤 공터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앉아 놀고 있었다. 같이 끼여서 놀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내일부터의 본격적인 장정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에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자리에 누웠다.

 

(이 다음 부분은 8912일이 되어서야 재개한 것)

77

예정대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설악산으로 갔어야 했으나 아침을 해먹고 나니 벌써 시간이 꽤 지체되어서 열 시경에야 시외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강릉 지방의 말씨는 귀에 익으면서도(대학교 때 하숙을 하면서 2명의 강릉 출신 사람을 만났으므로) 북한 말씨 같아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른 지방 사투리는 들을 때는 그대로 흉내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직접 해보려고 하면 제대로 되지 않아 소형 녹음기를 하나 사서 육성을 직접 담아보고 싶기도 하다.

강릉에서 한 시간 가량 버스를 달려 드디어 설악산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의 목적지. 남한 제일의 명산.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오고는 처음으로 와 보는 곳.

시내 버스를 타고 매표소에서 내렸다. 군인이라는 것이 좋은 때가 있다면 이런 때. 어디에 들어가든, 무슨 구경을 하든 간에(대구의 동부 시외버스 터미널의 아가씨는 할인을 해 주지 않았지만) 거의 오십 프로 정도 할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 값마저 싸져 버리지만.

석철이가 산에 올라가면 물건값이 서너 배 비싸다면서 사탕을 좀 사가지고 가자고 했다. 매표소를 지나서 등산로를 올라가고 있으려니,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이 길을 올라가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신흥사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었다.

선녀가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해서 이름이 비선대(飛仙臺). 잠시 몸을 쉬면서 보니 고등학교 때 보았던 그대로 깎아지른 절벽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보충 [98년도에 이 글을 컴퓨터에 옮길 때 쓴 것] : 고등학교 때부터 이때까지 나는 비선대라는 곳과 비선대 앞에 있는 장군봉을 착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의 오류를 깨닫게 된 것은 90년도의 설악산 기행 때였던 것 같다. )

누군가 작자를 밝히지 않은 사람이 시를 써 놓았는데 끝부분이 좀 아쉬운 감을 남기긴 했으나 그런대로 풍취가 있어서 좋았다. 이런 대자연 앞에서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가리는 게 쓸데없는 짓 같이만 여겨지고 대부분의 일들은 그냥 눈 감아 줄 수도 있으리라.

석철이의 배낭이 작아서 그가 가져온 텐트를 내 배낭 위에 얹여야 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무거운 배낭이 더 무거워 져서 어깨를 누르는 것도 참고 흐르는 개울물을 떠서 끓여 먹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라면을 소화시키며 걷고 또 걸었다.

생전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미지의 세계. 천불동 계곡으로 한 발짝 들여놓자 말자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봉우리 하나 하나 절벽 하나 하나가 그대로 비경이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의 맑음이란. 도시의 공기에 육신이,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들은 시간을 내서 꼭 찾아봐야 하리라.

수영에 맛을 들인 석철이는 수영할 수 있을만한 곳만 찾다가 물이 꽤 고인 곳에 이르자 나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재촉이었다.

옷 갈아 입을만한 곳도 없고 지나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떻게 해.”

옷 갈아 입는데 얼마 걸리나, 빨리 갈아 입고 수영하면 되지. 야 누가 오는지 좀 보고 있거라.”

수영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산길을 벌써 한 시간도 훨씬 넘게 걸어온지라 몸의 땀도 식힐 겸해서 옷을 갈아 입고 석철이를 뒤따라 물로 풍덩 뛰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 배우기를 겁을 내어서 가르치기가 정말 힘이 드는데 석철이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가 아직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했다. 잠수해서 팔을 젓는 것을 가르치고 난 뒤, 나는 또 허영심이 발동해서 그에게 다이빙까지 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점프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물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나는 입수하는 자세를 가르쳐 준 뒤 석철이에게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잘 들어가는가 싶었는데 물 속에서 하는 소리가 나더니만 석철이가 뒤집어져서 올라왔다. 물이 너무 얕았던 것이다.

오르기 힘든 코오스 코오스마다에는 철제 난간이 쳐져 있어서 그렇게 힘이 들진 않았단. 이런 것들이 없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산을 올랐을까 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다섯 시 오십 분에 양폭 산장에 도착했다.

(13)우리는 처음 양폭이라는 곳을 우리가 지나오면서 본 이중 폭포를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도에서 음폭이라는 곳을 발견해 내고는 양이라는 말이 두 양()이 아니고 빛 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이중 폭포가 깎아만든 벼랑은 얇게 드리워진 커어턴 모양 신비롭기만 했다. 폭포 위에서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물에 띄워 물줄기를 따라 떨어지는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내가 나뭇 가지가 되어 떨어지기라도 하는 양 아찔함을 느꼈다. 그건 공포이기도 했으나 피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죽음의 유혹.

양폭 산장 옆에는 매점이 있었다. 목도 컬컬하고 해서 맥주나 한 병 마실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캔맥주가 하나에 이천 원이나 한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비싸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너무 터무니 없는 가격이었다.

텐트를 칠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데 등산객 아저씨와 산장 주인 아저씨의 말이 들려왔다.

오면서 보니까 사람 찾느라고 난리 났읍디다. , 그래 내일 미국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다는 사람이 설악산 왔다가 소식이 없으니 죽은 게 틀림이 없지요.”

산에 와서는 조심해야죠. 잠시라도 한 눈 팔면......”

아저씨, 저 이 근처에 텐트칠 데 없읍니까?”

산장 주인 아저씬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산장에 재울려고 할 텐데 그 눈치도 모르고 우리가 물었다. 산장 주인 아저씬 아무말도 없고 옆에 있던 등산객 아저씨가 거들었다.

일기 예보도 못 들었오. 오늘 밤부터 비가 온다던 데 밤중에 산장에 들려하면 받아주지도 않소. 그러지 말고 따뜻한 산장에서 자오.”

그래도 우리들이 텐트 칠 자리를 찾자 산장 주인 아저씬 꼭 우리 들으라고 하는 말처럼,

요즈음 등산하는 사람들은 자연을 아낄 줄 모른단 말이오. 밥알 하나라도 물에 빠트리는 놈을 보면 내가 달려가서 귀싸대기를 살점이 묻어나도록 때려줄거요.”

귀싸대기를 살점이 묻어나도록이라는 표현이 우스워 석철이와 나는 웃고 또 웃고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적당한 육체적 피로는 좋다. 산행은 꽤 힘이 든다. 배낭의 짐이 너무 많아서.

 

78(8915)

굉장히 꿈자리가 사나웠다. 끊임없이 쫓기고, 만인의 돌멩이 세레를 받기도 하고. 너무나도 기분이 나빠져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석철아, 바람이 시게 부는데.”하고 자고 있는 그를 흔들자,

자자, .”라고 잠꼬대 비슷한 대꾸를 하는데 강풍이 몰아쳤다. 뭔가가 날아가는 소리.

밖에 나가 보니 텐트 커버가 바람에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우리가 밖에 나오자 텐트가 강한 바람을 제대로 이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져온 렌튼을 켜고 우리는 텐트 팩을 하나하나 더욱 깊이 박고 그 위에 큰 돌들을 얹여 놓았다.

우리 둘이 안에서 자고 있으면 날려가기야 하겠나?” 하고 석철이가 말했다.

하늘에는 먹구름만 재빨리 옮겨가고 바람소리만 지나는 게 으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웬일인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화를 내면서,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노.” 했다.

석철이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비가 오니까 우리 텐트 걷고 희운각까지 걸어 올라가자. 거기 가서 아침 먹자.”

처음엔 빗방울이 좀 떨어지는가 했는데 우리가 텐트를 걷고 산을 오르자 곧 빗줄기는 굵은 소나기로 바뀌었다. 나는 부대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판초우의를 입었다. 좀 불편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상체와 배낭은 가릴 수 있었다. 석철이는 미리 준비한 비닐로 그의 배낭만 쌌다. 아침 일곱 시였다.

양폭 산장에서 희운각 대피소까지의 한 시간이 넘는 등산길은 악몽이었다. 교육병 시절에 유격을 받기 위해 연무읍에서 고산까지 행군 하던 일이 새로이 기억에 떠올라 비교되기도 했다. 석철이 녀석은 내가 자기보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른는지 앞서서 가고 있었다. 오기도 생기고 이것 쯤은 할 수 있다하면서 이를 악물고 따라갔으나 가파른 언덕을 기다시피 오르다가 나는 휴식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산의 능선부분에 이르자(지도에 무너머 고개라고 표시된 곳 근처) 잠시 가늘어졌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어지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마디로 악전고투였다.

희운각 대피소에 이르긴 했는데 비를 피할 곳이라곤 화장실 옆의 빈 공간 뿐이었다. 그나마도 먼저 와 있는 네 명의 등산객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옆에 있는 문에서 나왔다. 처음 생각은 이 밖에까지 이렇게 사람이 나와 있는데 안은 오죽 하겠느냐하는 것이었으나 밑져야 본전, 일단 한 번 들어가 보자는 데로 석철이와 나의 의견 일치가 쉽게 이루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의외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내부는 꼭 군대 내무반처럼 되어 있었다. 한쪽은 단층이었고 다른 쪽은 (다락방처럼 만든) 이층이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리로 우리는 기어 올랐다. 나는 판초를 입은 덕에 상체는 거의 젖지 않고 바지와 신발만 젖었으나 석철이는 흡사 물에 빠졌다가 나온 꼴이었다. 배낭을 진 등부분은 젖지 않았으니 내 말이 백 프로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젖은 옷은 짜서 바닥에 말리고 급한 대로 대강 아침을 해먹었다. 석철이가 쌀이 모자랄지도 모른다고 걱정 하는 걸 들었는지 우리 밑에 있던 연인들 한 쌍이 쌀과 감자, 양파를 가득 주었다. 비가 와서 그들은 계획을 취소하고 내려가는 것인지 아니면 음식이 남아서 그런지 알 순 없지만 어쨌든 우리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배가 부르자 나른함이 몰려왔다. 처음 등산할 때의 참신한(?) 기분도 사라지고 약간은 귀찮아지고, 특히 몸을 적시는 비는 우리들을 짜증나고 지치게 햇다. 우리 둘 사이에 묵계라도 이루어진 것처럼 밥 먹은 것을 치우지도 않고 정신없이 잠을 잤다. (보충 : 어중간한 시간에 도착해서 우리는 돈도 내지 않고 이 희운각 대피소를 이용했다. 산장 관리인이 우리가 나올 때 약간 의심쩍은 눈초리로 보긴 했지만 별 말은 없었다.)

(98717)(8919)

휴식 뒤의 출발,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지긴 했느나 날씨가 개일 것 같은 가망성은 보이지 않았다. 양폭에서 희운각까지 오르는 길이 너무도 힘이 들었으므로 우리들은 짐을 최대한으로 가볍게 했다. 내가 가져온 짐들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두 명이 모든 짐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과 등산에 경험이 없었던 점을 감안 했더라면 좀 더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던 우리가 산행을 해 나갈수록 짐은 줄어들리라.

희운각에서 소청까지 이르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험난했다. 지금까지의 길은 산책로였다고나 할까? 바람은 갈수록 거세어만 가고. 등산객도 많이 줄었다.

수고하십니다.”

벌써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우릴 보고 인사했다.

아직도 대청봉까지 갈려면 많이 남았읍니까?”

한 시간 가량 더 가면 될 겁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모르는 사이일 때는 서로 인사하지 않는 게 관례인데 산에서는 모르는 사이끼리도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말동무를 하며 같이 오르기도 하고. 그게 목적이 같은 데서 오는 동류 의식인지. 아니면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적개심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

20미터 정도의 전방 이외에는 모두 구름에 덮혀 있어서 흡사 우리가 꼭 외계의 어디 완전히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도 들다가 문득 사람을 만나면 역시 우리는 아직 지구에 있다는 실감이 났다. 이렇게 항상 구름이 우리를 덮고 있다면 우리의 하늘은 구름이 아닐까?

어디서 부터인지 큰 나무는 보이지 않고 키 작은 관목과, 조그마한 흰꽃이 무수히 피어있는 작은 나무, 풀 등속만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센 바람엔 큰 나무들이 자랄 수 없다는 게 사실이리라.

 

세 시 경에 중청 산장에 도달했다. 바람, 지금껏 맞아본 적이 없는 거센 바람. 우리는 배낭을 풀어 중청 산장 근처에다 내려놓고 대청봉까지 뛰듯이 갔다.

작은 돌 조각, 입자들(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이 벌처럼 얼굴을 마구 쏘아대었다. 정말 바람에 날려갈 것만 같았다. 두 다리에 힘을 약간만 뺀다면. 얼마나 바람이 센 지를 시험하기 위해 나는 내가 입은 판초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하여 펼쳤다. 나의 몸은 이삼 미터 뒤로 날리듯이 물러 났다.

배낭이 없어진 우리들의 몸은 우리를 날릴 것만 같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중청에서 대청까지의 길을 거의 뛰듯이 나아갔다. 등산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정상 정복이었을까?

해발 1708미터.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구름 뿐. 온 천지에 가득한 구름. 불어오는 강풍에 우리는 시한 폭탄이 장치된 장소를 탈출하는 것 마냥 서둘러 기념 촬영을 하였다.

무엇을 정복한다는 말인가? 산은 아무 말도 않는데.

여기는 설악산 정상.

(111)

다섯 시간 가량의 등산. 그리고 세차게 불어오는 강풍 등을 이유로 우리는 중청 산장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런 날씨에 텐트 칠 곳도 못 찾고 날이라도 어두어 진다면‧‧‧‧‧‧.

산장에는 두 명의 젋은 사람이 있었다. 관리인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생긴 것에서 말투까지 모두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생긴 것 부터가 좀 미련하게 생겼고 말하는 것도 느렸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스포츠 형 머리로 , 금방 제대한 것 같았고, 말투며 생김새가 모두 날카로웠다. 그 사람들의 말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괜한 피해 의식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 사람들이 싫었다. 여기, 이 산에서는 내가 최고야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석철이는 그런 느낌이 없는지 그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에 오는 사람들은 쓰레기를 자기가 가지고 내려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온 산이 쓰레기로 덮혀버리거든요. 쓰레기통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또 시작이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기의 입장만을 생각할까? 그가 등산객이라면 자신이 지고 있는 짐들 중에서 필요 없는 것은 어딘가에 버리고 싶을 것이다. 인간은 정말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게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는 모두가 따라야 한다. 어쨌든 이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

우리가 오다가 수영을 했거든요. 그런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막 뭐라고 그러데요. 저는 수영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요.”

석철이가 응수했다.

인상이 날카로운 사람의 대답은 이랬다.

자연을 이용하는 건 나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산에 와서 밥 해먹고 수영하고 하는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연히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해요. 산에서는 쓰레기 문제가 제일 골치예요. 옛날에 일본에서 쓰레기를 아무데나 안 버리게 하기 위해 산에다 쓰레기통을 많이 설치 했어요. 그런데 그게 감당을 못해 냈대요. 그래서 이제는 등산객에게 입장료를 많이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 쓰레기를 가지고 내려와야먄 입장료에서 나머지 돈을 환불해 줘서 효과를 봤다지요. 우리 나라도 그래야 되요.”

 

가져온 자리를 깔고 노곤한 몸을 뉘였다. 석철이가 가져온 라디오로 방속국을 잡으면서 오늘 경험한 강풍에 대해 시를 쓰려고 했다. 아직도 바람은 계속적으로 벽에 부딪히고, 조그맣게 나있는 유리창을 떨게하고, 바람이 갑자기 거세어 질 때에는 이 산장이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두 젊은 관리인은 이런 일이 늘상 일어난다는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114)

   

강 풍

 

산장의 따뜻한 곳에 물러 앉아

몸을 날리는 강풍에 대해 쓰는 나를

고호는 한껏 비웃으리라

 

구름은 바람에 몰리어 우우 날려가고

바위를 붙드는 나를

바람은 돌멩이보다 무력하게 만든다

 

피할 줄 모르는 바람

자기를 막는 모든 것에 부딪힌다

쓰러뜨리려 한다

 

내 옆에서 같이 글을 쓰고 있던 석철이가 나의 글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웃는다. 정말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힘이 드나 보다. 분명히 우리 둘은 보통 때는 겪기 힘든 경험을 방금 전에 했음에도 그 기분을 글로 표현해낼 수 없다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계속적으로 이 강풍에 대해 적으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걸.

 

노대 바람

--설악산 정상 부근에서

 

내 두 다리로 뿌리박고 서지 않는다면

끝없이 날려가 버리리라

 

내 온 몸을 무자비하게 강타하는 이 바람

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공평하게 잔인하다

 

정상 정복에 도전하는 나를

사정없이 강타한다

 

극복은 또 하나의 도전일 뿐

차라리 다리의 힘을 푼다면

 

하지만 나는 정상을 향해

갈짓자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는다

 

 

 

노대 바람

 

금시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먹빛 하늘 아래 온 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이 바람, 바람 소리 뿐

 

미약하나마 내 두 다리로 뿌리박고 서지 않는다면 허공으로 솟구쳐 실 끊어진 연처럼 어드메 이름도 모를 곳으로 날려가 버릴 지도 모를 일

 

풀은 최대한의 낮은 포복으로 생을 견디어 내고 나무는 애시당초 이곳에 머무를 꿈을 포기한 양. 온몸을 벌떼처럼 따끔따끔 쏘아대는 돌 부스러기들, 급기야 내 판초우의는 억센 손길에 몸을 맡기고는 바람의 수천 번째 첩으로 전락하고

 

사분오열 만신창이로 찢기우는 몸을 추스리며, 애라 바람의 연인이나 될까 갈등과 싸우면서 대청봉이라 이름 붙여진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갈짓자로 물러나며 나아간다

 

(891, 9510)

 

그 때 사람들이 떼거리로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잠이라도 잤으면 하는 나에게 이들의 출현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저녁을 한다고 수선을 부리고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엠티나온 대학생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도 예전엔 대학생이었다우, 씨팔. 지금도 군인이기를 거부하고 대학생이기를 바라고 있다오.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우리의 허락도 없이 내일 아침을 지어 먹으려고 산장에서 꽤 떨어진 샘물에서 떠다온 물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지.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한 여학생의 말이 나의 기분을 다소나마 풀어 주었다.

우리 물 쓰고 다시 떠놓자.”

진짜 이 사람들은 강적이다라고 생각했다. 벌써 날도 어둑어둑 해지는 데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이런 날씨에 어떡하려는지.

여자들은 식사 준비를 하고 남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중에 굉장히 사람을 웃기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말씨가 천박해서 어떻게 여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고스톱 판을 벌여 시끄럽게 떠드는 것에도 불구하고 석철이와 나는 내일의 장정을 위해 잠 잘 준비를 했다.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기어코 우리들을 흔들어 깨우고 만다.

저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시자구요. 여기까지 와서 밋밋하게 보낼 수도 없잖아요.”

석철이는 부시시 일어나 그들과 합석했다. 나는 일단 잠이 들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타입이라 사양하고 그냥 자겠다고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참 뒤에야 잘 수 있었다.

 

(98720)(89115)

 

79

석철이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이번 산행에서 너무 그에게 의존하는 것만 같아 나도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밥을 지었다. 고산지역에서는 기압이 낮으므로 밥을 할 때 돌을 얹어야 밥이 설익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 내 그대로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밥은 제대로 되었다. 뿌듯함, 그리고 남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 이런 것이 매우 손중한 게 아닐까? 바람도 많이 가라 앉았다.

정각 9. 우리는 엠티온 학생들, 두 관리인을 뒤로하고 하산길에 오랐다. 내려가는 길은 미리 정해둔 대로 구곡담 계곡길.

내려가는 기분은 올라올 때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과연 산을 오른다는 것의 의미는? 산다는 것의 의미는? 시지프스의 고통은? 죽음이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약간은 착잡해 지는 기분에 잠겨 있는데 구름 속에 잠겨 있던 연봉들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벗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신비가 열리는 것만 같았다.

봉정암 뒤의 세 봉우리는 멋이 있었다. 특히 중간에 있는 봉우리에는 바위가 하나 더 얹혀져 있어서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저 중간에 있는 봉우리는 정말 신기하다.”라고 내가 말하니까 석철이가 그래 가지고 어디 글 쓴다 카겠나? 좀 더 멋있고 적당한 말을 쓰야지. 가령 하느님이 봉우리에 눈 똥 한 덩어리라던가?”

나에겐 진짜 유머 감각이 없는 모양이다. 진실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사람들은 그걸로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구나. 석철이와 나는 한 동안 그 암봉의 형상에 대해 이야기 했는 데, 내게는 그 암봉이 팬더곰이 앉아있는 형상같아 보였다.

(119)봉정암에서 약간 휴식을 취한 뒤에 우리는 구곡담 계곡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배낭의 무게도 많이 가벼워졌고, 계속 내려가는 길이라 그렇게 힘들일이란 없었다. 비는 내리다가 그쳤다가, 또 내리다가 가늘어 졌다가 변덕이 죽 끓듯 했다. 부대에서 가져나온 판초우의가 그런대로 쓸모가 있었다. 앞자락이 너무 길어서 발에 밟히는 게 험이었지만.

구곡담 계곡은 구비구비가 폭포로 이루어져 우리들의 눈을 놀라게 또 즐겁게 했다. 물이 불어서 폭포는 더욱 장관이었다. 정말 뛰어들 수만 있다면 폭포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짙은 초록의 물빛깔. 과연 폭포가 만드는 소는 얼마나 깊을까? 또 한 폭포는 높이가 거의 30미터는 되어서 가히 절경이었다.

중청에서 구곡담으로 내려오는 동안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준 것은 영남대였는지 부산의 동아대였는지 생물학과에서 매어놓은 빨간 리본이었다. 우리는 이 리본을 따라 걸었고 길을 가다가 리본이 보이지 않으면 다시 걸어나오곤 했다. 산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잃어버리기 쉬운지. 천불동 계곡을 오를 때와는 달리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구곡담 계곡 중간쯤이었을 거다. 우리는 산을 오르는 외국인 여자를 한 명 만났다. 그녀가 먼저 우리에게 헬로라고 인사를 했는데오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고 쑥스러웠다. 매일 미국인과 생활하면서도 외국인에 대한 스스러움을 벗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석철이의 수영에 대한 애착이 다시 발동이 걸렸다. 수영할 만한 장소를 발견하자 석철이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꼬드김에 마지못해 물에 들어갔던 나는 물의 차가움 때문에 금방 나오고 말았다.

이날 두 번째로 우리가 수영한 곳은 꽤 넓었고 수영하기도 좋았다. 물의 차가움을 이미 한 번 맛본 나였으나 은근히 오기도 생기고해서 풍덩 물에 뛰어들고는 헤엄치기 시작했다. 급류를 그슬러 올라가 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바위 밑이 시퍼런 게 꽤 깊어 보였다. 호기심과 알지 못할 두려움. 그러나 미신적인 생각을 떨치는 강한 과학적인 사고. 그래서 나는 그 바위 밑으로 헤엄쳐 가서 바닥을 보려하였다. 워낙 물살이 세어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나, 내가 바다에서 깨달은 것처럼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이빙도 한 번 해보려 했으나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러질 못했다.

갑자기 굵어지는 빗방울. 수도 없이 변하는 산의 기후를 보았으면서도 나는 뭔가 강한 확신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그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굉장히 강렬했다. 공포 영화에서 쓸데없이 주인공의 예감이 꼭 맞아들어갈 때의 그 기분처럼.

석철아, 요번에는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우리 빨리 내려 가야겠다.”

(120)340분 경에 수렴동 대피소에 도착했다. 수렴동 대피소에는 공중전화가 설치 되어있고 또 전보도 부칠 수 있어서 인가가 가깝구나 하는 실감을 느끼게 했다. 하기 아침 9시부터 해서 지금까지 점심을 먹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걸어내려 왔으니 꽤 많이 걸은 셈이다.

수렴동 계곡에서부터는 계곡이 넓어져서 강이라고 부르는 게 합당할 것 같았다. 산이 높으면 물도 깊어지는가?

수렴동 계곡 중간 쯤에서 일단의 등반객을 만났는데 그들의 배낭 크기를 보고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그 일행 중에는 여자도 있었는데, 진짜 그 여자가 진 배낭의 크기가 나의 것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묵묵히 산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에서 저들이 진짜 산악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설악산 산행은 정말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가만히 방안에 앉아 있었더라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껏을 겪을 수 있었고, 나의 시든,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해 주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은 더 가치있고 어떤 것은 덜 가치있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산행은 젊은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중의 하나라른 생각이 들었다.

백담 계곡에서부터는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을 터놓았기 때문에 우리 산행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게 실감이 났다. 산에서의 23일 동안은 잊혀지지 않고 내 기억에 남아있을 장면이 되리라. 백담 계곡의 경치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껏 더 오묘한 자연의 재주를 두르고 난 뒤여서 인지 큰 감흥은 없었다. 게다가 수영 금지, 야영 금지 등의 팻말은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우리 둘은 황당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몰려오는 피로와 무료함, 허기 등을 잊기위한 방편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계곡 가에 텐트를 치고도 합당한 변명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제였다.

요번에 이 텐트를 처음 사서 오는 길인데 제대로 서는지를 점검해 보기 위해 시험적으로 쳐 본 것이다.”라고 내가 말하자 석철이는 더욱 기발한 그러나 엉터리인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어디서 바람이 불어와서 텐트 가방이 날아가더니 텐트 살은 살대로 꽂히고 또 그 위에 텐트가 덮혀져서 이렇게 된 것이다.”

 

고픈 배를 참으며 걸어가노라니까 멀리 공원 관리소가 보였다. 거기에 가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석철이와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이 화장실 하나만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공원관리소부터 용대리까지는 포장도로였다. 길 양가에 피어있는 노랑과 고동색 빛깔이 뒤섞인 꽃은 풍취를 더 해주었다. 그리고 군인과 그의 애인이 팔장을 끼고 걷는 모습이란. 사랑이여, 아 나는 그때 그대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울먹이며, 아 물면서 몸새(?) 징소리 같은 것을 뱉아내다니.

 

내평리란 마을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빵 종류와 과자, 우유를 사가지고 그 가게 앞에 놓여있는 마루에 가서 먹었다.

아 이제야 정상적인 상거래를 하는 구만.”

석철이가 그 동안 겪어야만 했던 고가격의 불만을 토로했다. 정작 우리가 산 것이라고는 소주 한 병밖에 없었지만.

석철이 카메라를 자동 촬영에 놓고 둘이 함께 평상에 앉아 사진을 찍는 것으로 우리 둘의 설악산 여행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