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 빗소리
[7월 11일 ; 셋째 날]
(너무 세부적인 데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다 중요한 사실들에 역점을 두고 글을 써나가야겠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던 나도 마침내는 잠에 빠져 들었다. 일기예보대로라면 비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것이겠지만 하늘이 컴컴하니 별 한 점 안 보이는 게 꼭, 걱정 때문인지 깊이 잠을 못 자던 나는 한 두 방울 듣기 시작하는 비에 잠을 깨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형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텐트가 젖으면 무거울 텐데.' 그러나, 빗방울은 굵어지지 않고 조금씩 내릴 뿐이었다. 물론 그 소리도 텐트 안에선 크게 들렸지만.
얼마쯤 더 잤을지 모르겠지만 (잤을까?) 제법 굵어진 빗방울 소리에 나는 완전히 잠을 깨었다. 주환이 형도 깨어 있었다. 빗물이라도 좀 받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다가 어차피 한계령에 가서 밥을 해 먹을 텐데, 식수는 어제 그 사람들한테 빌린 게 남았으니가 하고 있는데, 우리의 유혹자가 "빗물 받아서 아침 해 먹자"고 했다. 평소에 산성비란 말로 요즘은 비도 함부로 맞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건만, 이곳은 아직 자연이 살아있는 곳이다 그래서, 계곡물도 빗물도 우리 인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물을 빨리 받을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는데, 플라이의 모서리에다 (물)그릇을 대어 놓으라고 했다.
생전 처음으로, 산에서의 일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었지만, 빗물로 밥을 해먹었다. 처음에 유혹자는 아침 10시나 11시쯤 출발하자고 했지만, 어제의 그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빨리 떠나기를 종용하기라도 했는지 출발을 갑자기 당겼다. 태룡이 형은 아직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쉬었다가 가기를 청했다.
밥을 해먹고 나니까 비가 개었다. 빗물 받은 그릇엔 자그마한 것(뭐라고 표현해야 적당할까? 티끌, 찌꺼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많이 있었지만(덧붙임. 불순물, 이물질 정도) 그런 것엔 모두 괘념치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팠던 까닭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플라이를 걷고 있을 때 나는 텐트를 치고 걷는 것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심보로, 텐트 안에서 내 배낭을 비가 맞지 않게 똘똘 싸고 있었다. 이것이 형들의 화를 돋구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을 해도 이것은 빈축을 살 만한 짓이었다. 단체 생활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편의만을 생각해 (어차피 우리의 삶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면 이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행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왜 내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내 의식 속에는 지난번에 석철이가 만들었던 비닐 비옷과 같은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성헌이 형이 무언가를 만들고 수리하고 하는 손재주가 있다는 것은 집에 있을 때부터 알았지만, 요번 등산에서 그 손은 더더욱 마력을 발휘했다. 내가 10여분이나 낑낑대며 겨우 만든 배낭 덮개를 성헌이 형은 순식간에 만들어냈던 것이다.
우리의 계획은 희운각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텐트를 치는 것이었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한 탓에 오늘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희운각까지는 가둬야 내일 서울로 돌아가는 게 편했고, 지도상 시간은 네 시간 반의 등반 코스였다. 그러나, 서북 능선 코스의 지도상 시간은 실지보다 훨씬 축소된 것이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능선길이라 해도 봉을 오르는 길은 가팔랐고, 바위산이라 길을 걷기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코스는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을 것같다.
10시 쯤 우리는 출발했다. 유혹자와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삼십 분 가량 일찍 출발했다. 유혹자에게 우리는 갈림길에서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좀 표시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아침에 나는 팔팔한 척을 했기 때문에, 또 실지로도 남보다는 체력이 덜 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몇 개 내 배낭 속에 넣어서 배낭이 엄청 무거워 졌다. 이 날은 나에겐 고난의 날이었다. 그리고 나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자신의 피로를 장난말로 잊으려고 했는지 태룡이 형이 나를 "똘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게 나의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했다. 내 행동이나 말이 차분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면서도 갑자기 따돌림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경과민이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때까지도 유혹자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30분 쯤 걸어서 넘은 봉을 귀떼기청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봉우리를 하나 넘고 나자 유혹자가 어제 설명했던 것과 똑같은 지형이 나타났다. 샘이 있을 것이라고 한 장소는 어제 우리가 잔 곳이 아니고, 여기라는 생각이 우리 모두의 머리를 스쳤다. 앞에 놓여있는 돌산도 어제 우리가 텐트를 친 곳에서 보이던 돌산과 지형이 비슷했다. 아직 우리는 귀떼기청도 못 넘었다. 만약 (어제) 유혹자가 착각을 한 것이라면 우린 아직 귀떼기청도 못 넘은 것이다. 가야할 길이 한 시간쯤 늘어난 탓인지 갑자기 힘이 빠지고, 주환이 형은 엄청난 소리를 하였다. 남설악의 한 높은 봉우리를 보고 그것이 귀떼기청이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귀떼기청이라면 오늘 하루 종일 걸어도 거기까지도 못 갈 것이다.' 나는 왜 주환이 형이 그런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할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사람은 가끔 정말 엉뚱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태룡이 형도 그런 것같다고 해서 나의 가슴을 놀라게 했다. 나는 그럴리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좀 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한계령 도로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형, 그럼 우리 내기해요. 5000원씩 걸죠"라고 했다.
(덧붙임. 방향이나 지형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또 다른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 역시 이 자취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시기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이 무렵이었던 듯하다. 성헌이 형과 주환이 형이 같이 쓰던 방에 여러 명이 모여 있었는데, 한 대여섯 명 되었을 것이다. 학생들의 자취방은 2층이었고, 또 바로 옆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전망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제기역의 방향을 두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방에서 남쪽으로 제기역이 있다고 생각했고, 나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오차가 났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다 생각이 저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좀 과장을 하자면 북쪽 방향에 제기역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역을 가는 길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막힌 하숙집에서 제기역에 대한 방향감각은 저마다 상당한 정도의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비는 조금씩 뿌렸으나 걷기엔 오히려 그게 편했다. 날씨가 흐린 탓에 설악산 봉우리들의 절경은 구경할 수 없었으나, 비가 그친 때에 언듯언듯 드러나는 봉우리들과, 구름이 재빨리 이동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유혹자는 지형을 잘못 보았고, 주환이 형의 터무니없는 추측도 빗나갔다. 진짜로 샘이 있는 곳으로 생각되는 장소로부터 (물론 샘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삼십 분쯤 걸어갔을 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높은 봉우리. 그것이 바로 바로 해발 1577미터의 귀떼기청이었다. 우리는 기념 촬영을 했다. 나는 누군가 버리고 간 기타 - 여기까지 기타를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은 진정 어떤 동물인가? - 를 들고 찰칵 하였다.
(원래 이 기행문을 쓸 때의 계획은 내 머릿속에 오가던 생각에 중점을 두어 적는다는 것인데, 지금은 그 때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삶에 대한 나의 견해는 이 글 마지막에 - 그것이 내가 산행하는 동안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이었으니까 - 쓰도록 하자.
(8월 3일) 발목 삔 것. 믿긴 믿데 너무 믿진 말자.
무릎을 상할까봐 연방 "맨소래담"을 발라대는 성헌이 형을 보며, 역시 등산화가 좋긴 좋구나 하던 나에게 그만 왼쪽 발목이 삐끗해 버리는 불상사가 찾아왔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진대다, 돌산을 오르내리는 길이라 어디다 발을 놓아야 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뒤로 쳐지던 나는, 기어코 앞서는 마음을 못 따라간 몸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농구를 하느라 늘상 삐곤 하던 발목이라 못 걷는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 일은 산행에 적쟎은 지장을 주었다.
예정대로라면 대청봉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있던 지점을 잘못 알았다는 걸 깨닫고 부턴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행히 비가 쏟아지거나 하는 일이 없이 그쳤다가, 아니면 가랑비로 내리곤 해, 신발이 젖어 찝찝한 것 외에는 걷기는 편했다. 하지만 가파른 봉우리로 올라갈 때는 숨이 턱턱 막히고 해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던 유혹자의 한계령 갈림길은 점심 먹을 때가 되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한계령 갈림길에 도착해서 우리는 마지막 남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성헌이 형과 주환이 형이 물을 뜨러 간 동안 나는 등산화를 벗고, 삔 발목을 주무르고 맨소래담을 좀 발랐다. 어떤 사람들은,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우리는? 하긴 나에게 있어서 육체 노동은 그리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집에 있을 땐 엄마 일이 바쁘면 도와줘야했고, 대목 땐 - 추석이나 설 - 군대 있거나, 학교에 있을 때도 도와주러 내려가지 않았던가?
(주환이 형 말) 인간은 요렇게 살라고?
우리가 한계령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야호'하는 소리를 들었고, 우리는 그 소리가 유혹자와 무지막지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을 해 응답을 했는데, 주환이 형과 성헌이 형이 물을 뜨러 내려가고 잠시 후에 한 여자 등산객이 우리 있는 곳으로 오더니 유혹자와 무지막지한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샘이 있는 곳의 위치도 가르쳐 주었는데, 그곳은 성헌이 형과 주환이 형이 내려간 곳이 아니라, 태룡이 형이 코펠을 들고 물을 뜨러 갔다.
한계령의 이 갈림길은 한계령 휴게소에서 가깝고, 대청봉에 오르기도 쉬운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공터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로도 알 수 있었는데, 정말 이 산쓰레기는 처치하기 곤란한 물건이었다. 분명 산쓰레기는 등산객들의 책임이긴 하지만,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버리고 싶은 욕망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렇다. 나도 나쁜 짓을 몇 가지 했던 것이다. 쓰레기 더민 더럽고 지저분하고 악취 풍기는 것이지만, 다람쥐란 놈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 더미 주변을 맴도는 다람쥐들은 그렇지 않았다. 털이 복실복실한 놈이 앙증맞았다.
모두 물을 뜨러 간 사이에, 나는 피곤한 나머지 살짝 물러났던 것이지만, 다람쥐와 장난을 쳤다. 사람을 보고도 별로 겁을 내지 않는 다람쥐였지만 발로 땅을 세게 구를 적엔 놀란 듯이 저만치 달아나곤 하였다.
주환이 형과 성헌이 형이 먼저 돌아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샘이 아니라 개울이었다. 라면은 석유 버너에서 흘러내린 기름 때문인지 아니면 손에서 묻은 것인지 기름 냄새가 났지만, 배고픈 김에 해치워 버렸다.
(이렇게 "육체 노동을 하고 난 뒤에 식사를 하면 밥맛 없다느니 그런 말은 못 하겠어요"라고 내가 한 마디 하자, "소화불량때문에 고생할 필욘 없겠지."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라고 만들어진 거야"하고 한 마디씩 하였다. 훈련소 시절 짠밥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밥을 남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다 배가 고팠을 따름이지. 정말 육체적 노동은 식욕을, 동물적인 식욕을 촉진시키는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먹고 사는 것일까? 살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할 몇 가지 조건들이 첫째로 중요한 것일까?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잘 먹고 살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산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다만 제거해야 할 악일까?
끝청까지만 가면 힘든 코스는 다 끝날 것 같았다. 희운각까지는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20분 걷고 5분 쉬는 식으로 정해놓고 걸었다. (오늘은) 체력이 떨어져 나는 계속 꼴지로 쳐졌다. 끝청을 오르는 봉우리에서는 오 분 이상 뒤떨어져 겨우 올라갔다. 끝청에 가기 전에 바위와 돌로 된 곳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가던 나는 급기야 한 곳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다행히 내가 넘어진 곳은 바위 돌산을 벗어난 산길이어서 별다른 상처는 없었지만. 그것은 내 등산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주환이 형이 앞서 가다 길을 잘못 들어, 벼랑 비슷한 곳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 중학교 때 앞산을 넘어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떨어지면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다행히 성헌이 형이 (다른) 길을 찾아내어 그리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벼랑을 기어오를 필요는 없어졌지만.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팔과 다리가 쉬임 없이 움직이는 순간에도 머리는 여러 가지 기억들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등산 전의 내 상태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신적인 면에서) 이번 등산은 그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라 구체화된 말은 "믿긴 믿데 너무 믿진 마라"라는 것이었다. 나무나 돌부리에 몸을 의존할 때, 냇물 위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 우리가 그것들을 믿지 못한다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너무 믿어버리면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사고가 났을 경우에 적절히 대처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살이에도 이 말은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삶은 어떤 것인가? 살아야 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 인간이란 동물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변할 수 있을까?
끝청에서 중청까지 20분, 중청에서 대청까지 20분, 이제 고생은 다 끝났다. 끝청에서 보니 대청봉이 구름에 가렸다가 나타났다가 했다. 길도 수월해 졌다. 갑자기 혜경이 생각이 떠올랐다. 혜경이 기억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왜 이때까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혜경이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을까 의아해졌다. '그녀는 이미 그 만큼이나 멀어진 것일까?' 두렵던 그 뒷모습. 뒷모습.
중청에서는 모처럼 구름이 걷히고, 연봉들의 장관이 보이는 듯했으나, 카메라를 갖다대는 순간 그 장관은 또 가리워지고 말았다. 빠른 자연의 변화, 중청 산장에 이르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계, 어디 동네 공터인 것만 같았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수도 셀 수 없는 학생들이 와글거리고 있었고, 어디선가 인원수를 확인하는 소리도 들렸다. 석철이와 나는 88년도 7월에, 그러니까 이 년전 바람이, 태풍같은 바람이 불던 날에, 산장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그 땐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마흔 몇 명인가가 단체로 올라왔다는, 중청 산장 앞을 장터처럼 북적대게 한 사람들은 알고 보니, 대구 사람들이었다. 대청봉에서 만난 네 명의 학생들도 대구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 "대구 사람들은 놀러 밖에 안 다니느냐"는 빈축을 형들로부터 받았다.
(예전에 한 번 올라간 길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대청봉을 안 올라갈 순 없는 일.) 배낭을 산장 담벼락에 붙여 세워 비가 안 맞도록 하고, 우리들은 대청본으로 올라갔다. 중청에서 대청으로 올라가는 길에 샘이 있다고 형들에게 이야기 해두었던 나는, 생각처럼 예전에 샘이 있던 곳으 ㄹ찾아낼 수가 없어 태룡이 형에게 "니도 그 사람하고 똑 같네"하고 놀림을 당했다. 물론 그 사람이란 유혹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혹자와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다른 길로 빠져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꼭 샘터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되는 헬기 착륙장 옆의 길은 출입금지 푯말과 함께, 콘센티노 와이어(덧붙임. 이 철조망의 이름은 지금은 잊어버렸는데, 그 당시에는 어떻게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콘센티노 와이어는 뾰족한 가시가 아니라, 직사각형 모양의 것이 달린 철조망을 가리킨다)가 쳐져 있었다. 정상 정복 자체에 큰 감회는 없었다. 이미 올라와 본 곳인 탓도 있지만, 정상이라 해도 별다른 것이 없고 다만 표지석만, 대청봉 1708m라고 적혀 있을 분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말한 네 명의 대학생을 만났다. 그 중 한 친구가 군대라도 입대하는지, '내 군대가기 전에 정말 기억에 남을 일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이루어낸 업적을 스스로 치하하고 있었다. 사실 꽤 먼 길을 걸어왔다. 오색 약수에서 대청봉으로 올라온 그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그러나, 자기에 도취될 나이는 지나지 않았는가? 정상이다. 정상. 그들 중 한 명은 사신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높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1미터 정도 되는 표지석 위로 올라가 포즈를 취했다. 아슬 위태하게 서서.
내려오는 길엔 '출입 금지'라고 씌어진 길로 들어가 보았다. 저렇게 팻말을 세워놓은 이는 누구일까? 나는 그가 누구이든 그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물이 필요하다. 물이. 나는 이따위 거짓말에 얼마나 속아왔던가? 더 이상, 아니 그보다 형들에게 한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여줘야 한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한 오십미터 정도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가니 예전 그대로 샘이 있었다. 아니 그 때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샘터였는데, 그 대신 도라무꽝(덧붙임 : 아마도 양철로 된 큰 둥근 통)이 큰 거 하나 놓여져 있고, 모터가 물을 신나게 빨아올리고 있었다. 우선 얼굴을 씻었다. 등산화도 벗어 발까지 씻으려고 끈을 풀다가 기다리는 형들 생각이 나서, 혼자만 발을 씻는다는 게 마음에 걸려 물만 수통 가득 담아가지고 올라왔다. 하지만 나의 수고는 별 가치 없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없던 물 담아두는 통이 중청 산장 근처에 있어서 형들은 벌써 그 물로 목을 축였던 것이다.
'부지런히 걸어가면 희운각 쯤 가서 텐트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환이 형이 걸고 넘어졌다. "오늘은 여기서 텐트 치자. 배 고파서 더 이상 못 걷겠다." 나는 그 때의(덧붙임. 친구와 2년 전에 왔을 때) 그 무서운 바람이 기억에 나서 웬만하면 희운각까지 (걸어) 내려갈 것을 주장했으나, 딴 형들의 의견도 주환이 형과 일치하는 바람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도 이상하게 중청에 도착한 이후로는 계속 개인 상태였다. 주환이 형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대청봉에서 해뜨는 것도 한 번 보고 갈 수 있을지 아나"하는 희망적인 의견까지 내세웠다.
(8월 5일)
앞에서 말한 대학생들은 산장에서 자지 않고 텐트를 치기로 결정해서 중청 산장 앞 넓은 공터는 또 텐트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텐트를 치는 방법, 배수로를 파는 방법, 텐트 밑에 비닐은 왜 까는가? 등을 설명해 주고. 그것을 주의 깊게 듣는 후배들. 경상도 토박이 말씨가 왜 그리도 구수한지. 인간이 정답게 모여 사는 모습은 왜 그리 아름다워 보이는지. 어느 텐트에서인지 (이 대학생들의 텐트는 아니다) "저녁 때 한판 땡깁시다"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건 우리 계획인데.
텐트 치기는 좋으나 쓰레기통 바로 옆이어서 불결한 장소를 버리고, 약간 좁긴 하지만 나무(관목)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텐트를 쳤다. "여기는 바람이 암만 불어도 끄떡없겠다"라는 성현이 형의 말에 저절로 수긍이 갔다. 공터에 친 대학생들의 텐트가 바람 때문에 무슨 문제는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면서도, 후라이(프라이)가 날아간다던지 텐트의 팩이 빠진다던지 하는 모양을 보고 싶은 욕망도 일어났다.
저녁 지을 물을 구하러 형들이 일러준 장소로 가고 있으려니까, (중청) 산장지기 아저씨가 내 물통을 보더니만 헬기 착륙장 옆 샘터로 가라고 하였다. "출입 금지"라는 팻말과는 관계 없이 그곳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그 팻말을 박은 것은 내 추측엔 헬기장에서 취사를 하고 제대로 취우지 않은 것에 화가 난, 아니면 그 일로 상관에게 호되게 당한 중청봉에서 근무하고 있는 군인들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 들으니까 그 "중청봉엔 두 명의 군인이(이런 것도 군사 기밀인가) 근무하고 있는데, 할 일이 없어서 이 산 저 산 놀러다닌다"고 했다. 샘터로 내려가니 진짜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이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와있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가 군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 때의 내 상상은 머리가 짧은 젊은 사람을 여기서 근무하는 군인으로 또 여자는 이 청년을 만나러 올라온 애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3분 카레를 끓여 저녁을 먹고 난 우리는 판을 벌였다. 첫날의 설욕전을 다짐하는 성헌이 형과 태룡이 형. 바람이 점점 거세어 지다가, 중청 산장에 도착한 이후로 멎었던 비가 다시 뿌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고돌이 운수는 나의 것이 나이었다. 패도 좋지 않았고, 뭔가 좀 될까 싶은 판은 딴 사람이 먼저 나 버리는 것이었다. 잔돈도 좀 바꾸고, 술 안주 내지는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해 초코파이를 사러 갔다. 개당 400원. 고도 1666미터는 물건값을 네 배나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건 벌써부터 알고 있던 사실에 지나지 않는 것. 대구에서 올라온 대학생들도 산장의 가게에서 뭔가를 사려고 알찐거리다, 그 턱없는 가격에 놀라 "여기서 뭐 사먹을 생각은 아예 안 해야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또, 대학생들이 산장에 들지 않은 것이 그리도 불만인지, 산장의 아저씨는 그들에게 괜히 트집을 잡았고,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다 그만 지쳐서인지 "아저씨가 옳슴다"하고 시인해 버리기도 하였다. 판은 성헌이 형의 것이었다. 갈 수록 잃는 돈의 액수가 늘어가던 나는 보통 때 같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으련만, 어차피 잃은 돈은 모자라는 여비(각자가 갹출해 낸 삼만 원은 거의 다 떨어져 차비가 모자랐다)로 충당된다는 생각과 내일은 부지런히 걸어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겹쳐 그만 치자고 하였다.
비가 와도 물이 새어들어 오거나, 밑에서 올라오지 않는다는 걸 어제의 경험으로 알았지만,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는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나의 꿈도 불안하였고, 잠은 오래 지속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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