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4개월 가량의 군 생활을 마치고 나는 1990년 봄 학기에 복학을 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맞은 이 여름 방학 때에 두 번의 큰, 그리고 의미 깊은 여행이 있었다.
한 번은 같이 자취를 하던 사람들과의 설악산 서북능선 종주 - 이 글은 블로그에 이미 올렸다 - 였고, 또 한 번은 혼자 남해안 일대와 제주도를 여행한 것이었다. 집에서 받은 용돈과 과외로 번 돈 등으로 여행 경비를 다소 두둑하게 가지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던 여행인데, 생각할 시간이 정말 많았던 여행이고, 아마도 본격적으로 나를 대면하기 시작했던 여행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혼자 일 주일 가까운 긴 시간을 여행한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글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여행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 때 처음으로 찾은 제주도는 새롭고도 이국적인 동시에, 혼자라 심심하기도 했고 또 식사 문제로 다소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이 당시에는 사진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 때의 경험들은 오롯이 이 글과 그 밖의 몇 개의 흐린 기억들로 남아 있다.
당시 적어 둔 것을 맞춤법 등 최소한의 수정만하고 그대로 옮긴다.]
머릿말
사회가 인간적이면 인간적일 수록 개인이 사회로부터의 고립화냐, 인간성으로부터의 고립화냐를 선택할 필요성이 적어진다. 사회의 목표와 인간성의 목표 사이의 갈등이 크면 클 수록 개인은 이 위험한 대립 사이에서 번민하게 된다.
-- 에리히 프롬의 [삶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고 나는 어제의 노트에 적었다. 지금의 내 생활은 벼랑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내 생활은 나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믿고 싶지만, 몸이 익숙해 지지 않으면 '마음 먹은 대로'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나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무절제하고, 무계획적인 생활은 위험하다. 물론 문제는 다른 생활에도 있다. 계획적이고, 인내하며, 노력하는 생활, 거기에는 낭만이 없고, 생명력이 없다. 딜레마라면 딜레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펜을 든다는 것이 너무 두렵다는 일이다. 씌어지는 나의 글이 너무도 초라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막연한 - 신경증적인 - 불안 때문인지 확실히 가려낼 순 없지만, 펜을 든다는 (보다 힘 있고, 완성된 하나의 작품을 쓴다는 일이) 무한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 부분은 어쩌면, 그 동안의 내 글쓰기의 게으름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애정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부분이 꼬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자연스러움이다.)
요번 여행에는 몇 가지 중대한 사건이 있었따. 이 경험들은 나를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이 사건들이 이 기행문의 중요 서술부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여행은 설레임으로 시작되었다가 두려움으로 끝나 버렸다. 그 변화는 글을 적어가면서 내 심리를 해부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고민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는 욕망을 버리고, 그리고 나 자신을 좀 더 가벼이(이 말은 조금 겁이 난다) 여길 수만 있다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희망"에의 믿음으로 가능한데 그건 어려운 문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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